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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판식 시인 / 하늘의 마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4.
박판식 시인 / 하늘의 마음

박판식 시인 / 하늘의 마음

 

 

커피를 코트에 쏟아서 세탁비를 물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저녁이 와서, 원하는 것을 얻어오지 못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길가의 갈대를 꺾지 않아서, 부모를 내가 고르지 않아서

아들이 내 말을 안 들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시장 고무 대야의 자라를 사서 풀어주지 않아서

사격에 소질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지 않아서

금값이 비쌀 때 금니를 해 넣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벚꽃놀이를 못해서

죽을 만큼 아팠다가 나았다가 다시 아파서

직장을 잃어서, 신년운세를 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또 용서받을 잘못이 있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

 

 


 

 

박판식 시인 / 골목

 

 

한 사람이 죽고 나니 온통 버릴 것 투성이다

 

아프다고 어렴풋이 들었던 옆집 할머니 돌아가시고

오늘 골목엔 때묻은 살림살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곧 떠날 준비들 하고 앉았다

 

비라도 내릴 듯 꾸물꾸물한 날씨에

몇 달째 치우지 않았던

할머니 집 연탄재가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결국 오늘

 

 


 

 

박판식 시인 / 나는 말한다

 

 

인생은 발걸음이 빠르다, 화요일에는 엉터리 같은

결심을 하고 금요일에는 2킬로그램쯤 살을 찌워서는

물방울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결심에 구멍을 내고 있다

 

마음은 사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구멍이 난다

이이는 사, 삼삼은 구, 사사 십육

아무런 문제 없는 인생은 우리를 속이는 거라고 이 친구야

 

삼 개월 감봉 당한 친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목 아래로 흘러내린 양말을 당겨 올린다

곧 눈이 내릴 것만 같다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죽는다

굴다리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외삼촌은 갑자기 파산했고

내용 없는 엽서가 사무실로 배달되었다

 

무엇인가가 이 세상에서

당신과 나를 놓지 않고 있다

그 못은 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착오라도 있었다는 듯이 눈은 내리자마자 녹아버린다

바람이 눈을 밀치고 행인과 입간판을 차례로 밀친다

떠밀린 채로 문이 열리고 다시 문은 열리고

 

 


 

 

박판식 시인 / 드라이브

 

 

우리는 분명히 길을 잘못들었는데 헛간으로 농장의 울타리로

어둠으로 우리의 예민해진 육체로 가까운 절벽의 파도소리로

여름밤의 전등 곁으로 오래된 불면증으로 방전된 헤드라이트로

터져버린 폐혈관으로

회오리치며 뻗어나가는 등나무의 생장점으로

우리의 인생과 무관한 비탈진 자갈길로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더

멀어져 가기를 바라면서

 

-시집 <밤의 피치카토> (2004년 천년의시작)

 

 


 

 

박판식 시인 / 인생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의 인생

 

 

인생은 우리를 씻어 주고 있다

외롭거나 괴로울 때 우리는 허물을 벗고

생명 그 자체로 돌아간다

 

어떤 인생이 지금 당신을 건져 올리고 당신을 누르는지 궁금하다

인생은 꼬리가 있고 가시가 있고 비늘이 있다

 

돌로 눌러 놓으면 숨을 헐떡이며 죽은 시늉을 한다

 

대문 앞에 버려지는 우편물과 죽어가는 전화번호

12각형의 소음으로 시간은 인생을 죽이고

 

가끔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저쪽 세상을 향하여

두 손을 합장하고

 

기적은 소량생산이라 아직 희소가치가 있다

인생은 기적적이다 깨물면 사과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비린내가 후추 냄새에 섞여 하늘에서 쏟아진다

 

나보다 10센티미터쯤 큰 어린 아들이

예수님의 석고상처럼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과분한 은혜와도 같은 사랑이 내 인생의 차가운 그릇에 넘쳐나고 있다

 

 


 

 

박판식 시인 / 화남풍경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동아일보 / 나민애의 詩가 깃든 삶』 2023.10.27

 

 


 

 

박판식 시인 / 네가 미로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나는

 

중년이라는 인생의 새벽은 장급여관 같다

벌들의 광기로 잔치는 끝나고 나는

멸균된 물처럼 실린더 속에서 출렁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플라스틱 나이프로 슬픔을 자르고

잡동사니 같은 추억을 버리고

오층석탑의 삼층쯤에서 올해는 7월의 당신 기일을 잊는다

당신을 더 그리워하는데

10년 만에 다시 본 CGV 1층 마네킹이 늙어서 놀란다

내가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일

할 수 없었지만 하려고 했던 일

인생은 그런 것들로 물결친다

평범한 인생, 멍든 얼굴들

작은집의 개가 죽고 석 달 뒤에는 아이가 생긴 큰집

나는 당신을 후생에 사랑하려고 아껴두었어

그런 수작이 통할 리가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아들이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어머니 솜씨에 달렸다

아홉 살까지만 지켜보아도 인생의 가장 좋은 추억

세 가지 중 한 가지는 날린 셈이다

죽음이 내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다

강풍이 언덕의 나무를 뽑고 사람들은 죽어가느라 바쁘다

인생이라는 얇은 바다

나는 감자튀김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허기진 입

 

 


 

박판식 시인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1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밤의 피치카토』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날개 돋친 말』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2014년 김춘수 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