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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경나 시인 / 오래된 호주머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4.
홍경나 시인 / 오래된 호주머니

홍경나 시인 / 오래된 호주머니

 

 

 흔하디흔한 점경들 시퍼렇게 동록 오른 몇 닢의 구리동전과 희치희치 은박이 벗겨진 은종이와 딱 붙어버린 롯데 커피껌 통통하게 살 오른 앵두 한 움큼을 넣어두었다 영영 만날 수 없는 평행의 우주와 짤그랑짤그랑 은하수가 흐르던 한 채의 밤 까맣게 잊은 코티드 아스피린과 아주 잊은 두통을 넣어두었다 잊은 리듬 잊은 봄 잊은 분홍 언제든 꺼내 볼 기어이 잊은 오후를 넣어두었다

 

 그곳이 어디이건 그것이 어느 때건 주머니 속에는 있다 오래 쥐고 있었던 나무묵주와 한결같이 이국적인 아쉐레트 하드바리임이 있다 희한하게 잡히지만 손바닥에는 없는 호호 언 손을 녹이던 더운 입김 같은 천근만근 남은 것이 있다 손끝에 알알 시물새물 곰삭은 안감 사이 뭉긋이 남은 남은 쪽 남은 말 남은 초록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는 남은 21그램의 무게가 있다

 

 무작정 끌어다 집어넣어 두었던 손이 없다 무럭무럭 자라던 손톱으로 서로의 손등을 찔러대면서 힘껏 손깍지를 끼고 끝까지 붙움키던 손이 없다 가끔 네 손을 놓친 내 손이 제멋대로 떨릴 때마다 환한 실졸음처럼 더듬어대곤 했던 달고 따뜻한 네 체온이 이제는 없다 넣어 둔 기억은 뚜렷한데 꺼낸 기억이 없는 홀딱 까뒤집고 탁탁탁 먼지 한 점마저 털어도 오래된 호주머니 속에는 없다

 

 대체 난 무엇을 넣어두었던 걸까?

 

 


 

 

홍경나 시인 / 나들이

 

 

 할머니와 나들이를 갔다 흰 머릿수건을 두른 할머니는 꼬신내 나는 콩고물 묻힌 주먹밥과 호미 담은 대광주리를 옆에 끼고, 나는 할머니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가는 재 너머 할아버지 묘가 있는 콩밭

 

 할머니는 묏둥* 위 다보록이 돋은 쑥대 성깃성깃 자란 띠풀을 뽑아 들고 가만히 봉숭아꽃물 진 얼굴로 저 먼 데 하늘을 점두룩* 바라봤다 해 들면 덥다 여기서 놀거라 잎 큰 아주까리 아래 나를 데려놓고 예닐곱 이랑이랑 콩밭을 맸다

 가끔 때까치들이 할머니가 김을 매는 밭고랑 사이를 푸르룽 푸르룽 다녀갔다 나는 혼자서 붉은 흙을 쑤시고 파고다독여 아주까리 이파리로 지붕 얹은 개미집도 만들고 달개비꽃 따다 꽃밥 짓고 콩이파리 따다 콩잎자반 재고 새금파리 그릇 삼아 상을 차렸다 맛나지 할머니, 우리 할머니 냠냠 묵자 할머니가 내게 그러듯 할머니께 밥 떠먹이는 숭내를 냈다 이도 저도 시장스러지면 아주까리 그늘에 엎드려 콩고물주먹밥을 오물거렸다 되새김질하는 우리 집 누렁소처럼 입을 놀리다가 거물거물 잠이 들었다 꼼지락꼼지락 콩밭귀로 내려오던 산 그늘이 두툼해지면 젖은 등더리에 업혀 어느덧 집으로 돌아왔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할머니는 색동원삼 명주옷 곱게 차려입고 꽃상여 타고 혼자 나들이를 떠났다 믈그름 감또개 톡! 톡! 떨어지는 고샅길을 돌아 나랑 다니던 나들잇길로 재 넘어 할아버지한테 가버렸다 새벽부터 개가 듣던 그날 삼베두건을 쓴 상두꾼직동할배가 그날은 할머니를 따라가면 못쓴다고 타일렀다 오호오오호 오상엿소리가 나 대신 재 너머까지 할머니를 길게 길게 따라갔다

 아주까리 너른 그늘로 때까치 왕개미 떼 지어 놀고 나는 할머니 백목 치맛자락 꼭 쥐고 콩밭으로 나들이를 간다

 

*묏둥:묏둥

*점두룩 : 저물도록

*물그름: 물끄러미

*감또개: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는개 :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홍경나 시인 / 그 비린 것 한 토막

 

 

비린 것 그 한 토막이 먹고 싶다 하셨네

 

할머니는 즐기던 녹두죽도 근 가웃 사태살 푹 고아 베밥수건 밭여 끓인 장국죽도

곱게 쌀알 갈아 홀홀하게 익힌 무리죽도 응이薏苡도 기어이 넘기지 못했네

 

음식솜씨 짭찔받던 그니는

뜬숯 피운 풍로에 새옹밥* 짓고

적쇠 걸어 간갈치 한 토막 노랑노랑 구워내셨네

솔솔 김이 오르는 이밥 위에 얹어주던

그니는 잔가시 지느러미 살 발라 먹고

간지숟가락*에 뜬 이밥 위에 실한 살점 골라 얹어주셨네

그니가 아, 하면 나는 따라 아, 입 벌려 받아먹었네

제비둥지 제비새끼같이 받아먹었네

 

아시를 보고 생청붙이*는 내게 빈젖을 물려주던 그니가

이제는 북천北天바다 갯내 같은 비린내를 풍기는 그니가

물 만 밥에 비린 것 한 토막 얹어 먹고 싶다 하시네

 

나 혼자 아, 입 벌려 받아먹던

그 비린 것 한 토막

 

*새옹밥: 놋쇠로 만든 작은 솥에다 지은 밥

*간지숟가락: 곱고 두껍게 만든 숟가락

*생청붙이는: 억지스럽게 모순되는 말을 하는

 

-시집 『초승밥』에서

 

 


 

 

홍경나 시인 / 나물서리*

 

 

 으너리야 더너리야 모시딱지 쇠딱지야

 고두설기 시설기야 밤나물아 참나물아

 니 어딧노!고마 내 눈에 비뿌라*

 

 궁절(窮節)이면 사나흘 걸러 기명물* 밥띠기도 건지 묵을 만큼 살림이 매란없다*는 알마실 애수쟁이집서 접방살던 알금뱅이 신기동띠기는 점두룩* 씬내이* 돈내이* 씀바구 꼬사리 꾀치미* 엄나무순 두릅순을 해서 마카 강지리에 이고 우리 집으로 왔다 시부지기 안마당 들머리에 나물 강지리를 부려놓고 아지매요 아지매요 지녁밥 재우치는 소리를 했다 할매는 말없이 밀가리 푸대에 고봉으로 된 보쌀 한 박재기를 담아 건넸다

 

*나물서리:보릿고개 때 가난한 아낙네가 산나물을 광주리에 담아 부잣집 마당에 풀어놓으면,그집 안주인이 보고 대신 보리나 쌀 등속을 나누는 풍속을 이름.

*영남내륙지방에서 불렸던 나물타령.

*기명물:개숫물.음식 그릇을 씻는 물

*매란없다:형편없다

*점두룩:저물도록

*씬내이:씀바귀

*돈내이;돌나물

*꾀치미:고비

 

 


 

 

홍경나 시인 / 참 느린 봄처럼

 

 

 아시를 보고 난생처음 외가에 보내졌을 때 엄만 줄 알고 자꼬 품을 파고들다 잠을 깨 젖 달라고 보채는 내게 귀밑머리 붉던 처자가 안중 시집도 안 간 처자가 젖을 꺼내 빨리며 시상달강 시상달강* 해쌓던 간지럼을 잘 타던 남수 이모 뒤안 늙은 뽕나무에 달그리 오디가 익으면 나 하나 이모 하나 너나들이하고 나물 뜯으러 갔다가잔디마다 속잎 내는 고들깨 씬내이 소루쟁이 물쑥일랑 털모가지 노란 올꼬사리 고비일랑 반 광주리도 못 뜯고 잠 든 나를 업어 떡곡재 십 리 길 배틀걸음 걷던 이모 볕 따라 꼬실꼬실 물고추 도톨밤 마르던 툇마루에서 달군 젓가락으로 앞머리 말아 젓가락 파마를 해주고 갈래머리 곱게 빗겨 땋곤 히야!우리 경난 인자 엄마 젖도 안 찾고 다 키았네 읍내 미용사가 되고 싶다던 이모

 

 마도로스 이모부를 따라 부산으로 시집가던 날 쫓아가겠다고 기를 쓰며 우는 내게 외할매 말 잘 듣고 착하기 있으마 세 밤만 자고 꼬옥 델로 오꾸마 손가락 걸고 약속하더니 일 년 이 년 삼 년… 넘어도 오지 않더니 업고 걸린 어린 사촌 둘을 데불고 첫 친정나들이 왔던 새빨간 거짓말쟁이 이모

 

 더럭 낯설어 외할매 치맛자락 뒤에 숨는 나를 보며 젖이 돌아 거무죽 적신 옥양목 블라우스 앞섶을 끌러 불룩한 젖통을 사촌 젖먹이동생에게 물렸다 경나야 니가 빨던 젖 한 번 더 빨아볼래 나를 놀리던 목소리가 안뜰 함박꽃같이 희고 푸지던 전실이* 이모

 

 간지럼 잘 타던 이모가 천지간 새봄 오면 싸릿대 모싯대 누르대 아곰자곰 꺾자던 이모가 조선족 요양보호사 떠주는 죽을 먹고 있다 그이가 해주는 대로 머리를 빗고 그이가 하자는 대로 비리갱이* 같은 몸을 뒤집고 있다 바짝 말라붙은 오딧빛 젖내가 흐들시다 참 느린 봄처럼

 

*시상달강 시상달강:아이 어르는 소리

*실이:여성이 시집을 가면 시가의 성을 따라 부르는 호칭.주로 친정에서 사용하던 말

*비리갱이:비루 오른 강아지

 

 


 

 

홍경나 시인 / 보리저녁

 

 

지금 아침이가? 하더니

 

다시 당신은 졸고 있네

멀겋게 쑨 미음을 목구멍에 넘기다 말고

유기농우유 한 모금 느루 머금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미간을 좁히며 가만히 흐느끼네

흐느끼면서

툭하면 다녀오자, 한번 다녀오자 조르던

아버지 어머니 기다리신다고 가끔 꿈에서나 다녀오곤 하던

현풍 시부모님 산소로 바깥나들이 가네

 

움펑한 눈을 반쯤 뜨고

햇살 밝은 대낮 지금 밤이가? 묻네

 

당신은 잠을 깰 때마다 약속이라도 있듯이 시간을 물어오는데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언제 불쑥 들이닥칠 것만 같아

덩달아, 바쁜 약속이 생긴 사람처럼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메모장에 적고 있는데

 

지금 당신 졸고 있네

 

난간에 기대 선 색동분꽃은 물끄러미 피는데

보리저녁 서녘하늘은 노랑 다홍으로 개는데

 

 


 

 

홍경나 시인 / 시르렁둥당 서부렁섭적*

 

 

양달 돋은 장독간

오글자글 잉걸빛깔 햇장이 익는다

 

둥시감**멀리 흥건하고

실금 간 소금단지 아랫녘

나직한 줄띠문***중두리엔

곰상곰상 멸치젓

돌죽담 맷돌호박 두리두리 여물고

고샅머리 석류나무엔 참새떼가

오구작작 오구작작 재잘거린다

 

봉사꽃 피었다가 지는 자리

다복다복 계관화 돌레돌레 두릅꽃

애기재기 금송화 새하얀 구절초

 

헛간 비름빡 모지랑호미****말라가고

으밀아밀 누룩뱀이 허물을 벗고

타래쇠 사슬문고리 틈으로 찌르라미 소리가

시르렁둥당 서부렁섭적

 

*시르렁둥당 서부렁섭적:현악기를 흥겹게 타는 소리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선뜻 건너뛰거나 올라 서는 모양을 합친 말.

**둥시감:크기가 작고 공처럼 둥근 감.곶감을 만들기에 적당하다.

***줄띠문:옹기 문양의 하나****모지랑호미:끝이 닳아서 모지라진 호미

 

 


 

홍경나 시인

1961년 대구에서 출생. 2007년《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초승밥』(현대시학, 2022)이 있음.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2022년 천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