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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열 시인 / 공갈빵 파는 부부
정자어판장 귀퉁이에 리어카 세워 놓고 공갈빵 파는 젊은 부부가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여름 한낮 말 대신 수화를 하는 이들에게 공갈빵 이천 원어치 사서 오는 길에 천천히 빵을 뜯어본다. 둥글고 넓적한 빵 속은 텅 비어 있다. 내부가 멀쩡하게 비어 있다.
그 공갈빵 씹으며 리어카를 떠올린다. 통 손님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다 팔리려면
아직도 까마득할 그 쩍쩍 들러붙는 공갈 반죽 안고 우두커니 있을
공갈이 많이많이 팔려야 좋을 그 둥근 얼굴들
빵 속에는 종일 허기진 말이 가득 부풀어 오른다.
권주열 시인 / 1963
다리는 몇 개를 더 놓아야 좋을까
휠체어를 탄 사람이 다리 위로 바퀴를 굴리며 지나간다 운동에 없는 다리가 다리에 없는 동작으로
다리 위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보느라 잠시 멈춘 다리, 기하학적 고독 발의 신체로 남은 것과 신체로 남은 발 사이에 물질성을 띤다
다리는 다리를 건너기 훨씬 전에 출현한다 하나의 다리에 하나의 발을 달고 걷는다와 건너다를 업고 가는 다리,
강을 굽어보는 다리의 발이 아니라 강에서 분리된다. 아득한 발자국 다리 아래로 몇 개의 발이 필요한가 다리에서 가장 멀리 온 발들
멀어서 갈 수 없는 발들 무너진 다리를 걷는 일은 디딜 수 없는 발에 남은 장소다,
펄럭인다
-시집 『한 사람들로 붐빈다』에서
권주열 시인 / 첫눈
눈이 내리는데 온다고 쓴다
일요일 운동장에 우산을 쓴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 눈사람이라고 쓴다
흰색으로 사방으로 중얼거린다
흰색과 일요일은 혼자다 사람과 눈사람은 혼자다
온다는 건 가만히 오는 것과 온 것 사이에 내리는 말
한 사람들로 붐빈다
-시집 『한 사람들로 붐빈다』에서
권주열 시인 / 구름의 옛날 방식
언어에 물기가 번질 때가 있다 슬몃 언어의 행간에 우산을 받쳐 놓는다 도착 지점이 익숙하지 못한 비는
길이가 달라 방향이 틀려 누가 누군지 의문으로 가득하고, 웅덩이나 축축한 빈터에 미결로 남아 아직도 의아하고 무언가 잠시 망설여야 될 것 같아 우산으로 가리면, 우산은 자신의 치수에 맞는 하늘을 만들어 준다*
산에 들에 비를 캐러 다녔네 넘어지는 비 절룩이는 비, 비의 뿌리는 투명하고 빗줄기는 가늘다 비는 가끔 있고 비는 넘쳤고 비가 오지 않는 체육 시간, 모두 빠져나간 교실에 우두커니 남은 아이, 교실은 가끔씩 도난 사고가 접수되고 어리둥절 교무실 앞 복도에 오래 두 팔을 쳐들고 서 있던 아이, 너무 많은 비, 우산이 없었네
머리 위로 발설하지 않는 비 늘어뜨리지 않고 긴 구름의 옛날 방식, 비는 외롭고 결혼 같고 구운 구름 냄새가 나
병원에 누워 링거를 맞는다 유리관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방울들 온몸이 열대지방을 지난다 병실 유리창에 구름이 비친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허공에 내리고 있다
*로제 폴 드루아.
권주열 시인 / 매우 쪽으로 선 나무
내가 오른쪽이라 했을 때 꽃은 더 쪽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왼쪽을 가리키자 잎사귀는 가만가만 덜 쪽을 응시하고 있다 귀를 감은 왼쪽이 천천히 찻잔에서 흘러내리고 내가 고여 있는 아래쪽은 뿌리가 있는 늘 쪽이다 줄기가 휘어지는 빨리 쪽은 내가 바라보는 앞쪽이다 내가 뒤쪽으로 돌아설 때 비는 가끔 쪽으로 내리고 내가 염려하는 안쪽은 붉은 열매의 너무 쪽이다
권주열 시인 / 손의 외출
말 대신 수화를 하는 사람을 본다 말이 몸 바깥에 있구나 하는 순간
컵을 쥔 손을 떨어뜨렸다
쟁그랑 하는 소리가 눈 속에서 난다
손이 몸 안으로 떨어진다 얼떨결에 손을 잡으려던 말을 놓친다
무슨 말이 더 남았을까 여전히 허공에 쟁반을 받쳐 두고
구름 밖으로 기다랗게 빠져나가는 비처럼 말 밖으로 손이 빠져나가는 중이다
손가락 마디가 사라지는 쪽으로 침묵이 컵을 들어 올린다
권주열 시인 / 연장(延長)
창문도 현관문도 잠겼는데 먼지들은 어떻게 왔는지 밥상 위에 뽀얗게 내려앉았네요
가만가만 식사 중입니다
가만 놓인 컵, 가만있는 쟁반, 그 위에 가만 엎드린 수저 모두 가만을 먹고 있네요
가만은 달콤합니까 가만은 정말 질길까요
불빛은 가만과 가만 사이로 흘러내리고 벽은 가만히 쳐다봅니다
가만은 그대로의 살입니다
권주열 시인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바케트를 물고 베케트를 읽는다
밀가루와 말 사이에 숭숭 뚫린 입들
웅얼거린다 이스트,
아무도 다물지 않고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다
―잘못 말하기 ―잘못 없이 아주 잘못 말하기
거머쥔 빵이 아니라 빵의 표시처럼 여기 없고 오직 남은 이곳,
아닐 수도 있다 이곳이 아닐 수도
드러냄으로써 드러나지 않는 지점까지 종잡을 수 없는 말들
침묵이 다 사라질 때까지 결코 침묵할 수 없는 말,
어떤 말도 아무것도 아닌 말보다 허약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제목.
권주열 시인 / 전봇대
전봇대는 전세방이다 전봇대는 달셋방이다 전봇대는 급전이다 전봇대는 구인이다 전봇대는 구직이다. 전봇대는 모집이다 전봇대는 급매다
이 모든 것들에 전류가 흐르고 불이 켜지길!
권주열 시인 / 수목장을 위하여
나, 한 그루 나무 아래 잠들고 싶네, 아니 이다음에 천천히 나무에서 나오고 싶네. 이따금씩 구름의 몸을 빌려 달려오는 소낙비 칭칭 감고 나무에서 나오는 내 귀를 듣고 싶네. 나무에서 나오는 내 모든 것을 읽고 싶네.
먼 훗날 숲을 걷다 문득 뒤 돌아보렴 아이야
낙화한 꽃들이 어떻게 다시 저벅저벅 나무로 들어가는가.
떨어진 잎들이 어떻게 다시 고요히 나무를 흔드는가.
-시인 73명이 세상에 남기는 『시로 쓴 유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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