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남 시인 / 모두가 들국화 시인이 되게 하라
이번 가을은 농부들 마음 위에서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게 하라 그리하여 섬돌 아래에서 사발로 춥게 하라 튕겨낼 듯 댓가지 휘고 있는 가을 과일들도 그 꽉 찬 결실만 생각하며 따게 하라 혹 깨물지 못할 쭈그린 얼굴이 있거든 그것은 저 빈 들녘의 허수아비 몫으로만 남게 하라 더 이상 지는 잎에까지 상처받지 않고 푸른 하늘과 손잡고 가고 있는 길 옆 들국화처럼 모두가 시인이 되어서 돌아오게 하라
김영남 시인 / 가을밤이 되면
달, 저 달을 싸리울에 묶어본다 허름한 말뚝에 매어본다
그러면 달은 짖는다 짖어 푸른 밤이 된다
나는 푸른 밤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가 묶어 둔 달을 풀어준다
달은 깻단 이고 오는 어머니를 따라온다 살랑살랑 꼬리 치며 삽살개도 따라온다
이번에 달 대신 개를 묶어본다
달은 어느새 동산위로 올라가고 개는 기둥 주위를 맴돌며 밥그릇의 달빛을 핥는다 동료처럼
그러면 지붕에는 외삼촌 닮은 얼굴 하나 백자 항아리 술병을 허리에 차고 웃어오고 어디에선간 위험 신호의 호루라기 소리들 그 소리에 이어 푸른 바닷물 밀려오는 소리들
이내 난 허우적거릴 것 같아 허우적거리다가 지붕과 함께 잠겨버릴 것 같아 익사직전의 구조요청을 누군가에게 계속 하게 되고
달, 저 달은 날 가둔다. 바다 한가운데 가두고 고백하라, 반성하라 고문을 해온다
김영남 시인 / 나의 고지식함을 알았다
그의 말 속에는 의자가 있다 형체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의자
그는 늘 그 의자를 들고 다니면서 고객을 만나고 손님을 접대한다 어떤 때는 가끔 그 의자를 집에 놔두고 출근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집에서 그의 마누라가 이를 반들반들하게 닦아놓는다 그는 줄곧 출세를 했다 고속 출세를 하다보니깐 신호 위반도 많이 했다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뛰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다 그럴 때에도 그는 그 의자를 봉투에 넣어 건네주고 위기를 넘겼다
어느 날 나도 나를 한번 들여다봤다 의자가 없었다
김영남 시인 / 빨래
이렇게 모가지를 비틀면 어떡하냐고 찔끔찔끔 눈물을 짜며 그가 완강하게 버틸 때면,
이놈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시커먼 거짓말 뱉어내지 않고 끝까지 숨기고 있다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두둘겨 패서 질질 옥상으로 끌고 가 거꾸로 매달아버린다. 그녀는 그러면 그는 그때서야 얘기를 꺼낸다 정말 이렇게 나아가서는 안되겠다고, 어떻게든 집안에 평화의 깃발은 펄럭여야겠다고
보라, 그녀는 그를 다루는 1급 기술자다
김영남 시인 / 아줌마’라는 말은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 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 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으로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 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한번도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이 세상까지 모두 흡수해 버리는 포용력 큰 불발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김영남 시인 / 하현달
어느 날 밤 마당가에서 서성이다가 나는 보고 또 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달빛, 돌아오지 못한 할아버지 흰 옷자락을. 잠 못 든 댓잎 소리, 싸락눈도 잘게 뿌리고 있었다. 그때 동네 대밭 머리 위로 떠오르던 하현달. 이윽고 우리 집 신발장 위로 싸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어릴적 무서운 그림자의 기억, 무서운 꿈처럼.
사납게 개 짖는 소리를 끌고 달빛이 집 대문을 막 넘어오고 있었다. 받아올 것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그 흔한 싸리울 하나 세우지 않고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밤 까닭 없는 부름으로 대문을 나섰다 흰 고무신 두 짝만 남기고 맨발로, 맨발로.
그 뒤로 문고리를 꼭꼭 잠그셨다, 할머님은. 등잔불도 아예 치우고 누워만 계시다가 어둠이 되셨다, 할머님은 끝내. 누구의 부름을 받으신 걸까?
등불 없어진 자리처럼 허전한 우리 집. 마당가에 서서 문득 신발장을 다시 올려다 봤을 때 마지막 유언처럼 남아 빛나는 신발. 그 속엔 밝히지 못한 어둠이 있다, 읊조리며 시린 눈을 감았다 뜨면 마당 가득 쳐들어오는 시퍼런 물결. 그 무서운 기억의 달빛 속 싸락눈으로 나는 싸늘하게 깨어 서성이고 있었다.
-시집 <정동진역> (민음사)
김영남 시인 /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가보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가서 한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
가쁜 숨을 기쁘게 내쉴 것들을 고르다 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워 있는 침대, 누워 있는 천장, 누워 있는 하늘… 저기 한 여자도 한사코 누워만 있는 바위를 올라타느라 가쁜 숨을 크게 내뿜고 있다. 여자가 슬슬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니까 귀엽다. 용감해 보인다. 아니, 불행해 보인다. 세상에! 오죽했으면 여자가 하늘을 올라타야 할까?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번 올라타 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명자 시인 / 술래잡기 외 6편 (0) | 2025.10.29 |
|---|---|
| 이유정 시인 / 무너진 것들 외 10편 (0) | 2025.10.29 |
| 김성호 시인(청주) / 호스를 잡아당기는 사람 외 6편 (0) | 2025.10.29 |
| 김순아 시인 / 배운 사람 외 7편 (0) | 2025.10.29 |
| 김월수 시인 / 마음속의 고요 외 6편 (0) | 2025.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