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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 무지에 대하여
여기서 핸들을 조금만 오른쪽으로 틀면 그대로 피안이다 도시의 지붕들 위를 날아 긴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하겠지 나는 그 포물선의 어느 좌표쯤에서 생의 끈을 놓고 있을까? 살아 있다는 것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나오면 다시 생은 더 어두운 터널로 나를 채근한다
좌석버스 안에서 죽은 사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옆자리에서 앉았던 사람들은 그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썩지만 않는다면 죽음도 옆에 두고 친할 만하다 인형에게 말을 건네는 아이들은 살아 있는 죽음을 보고 있다
익사자는 어느 순간 생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뻔한 낙관이지만 나는 그 순간에야 무엇이 보일 것 같다 소는 불이 나면 그냥 서서 타죽는다 처음부터 삶은 없었던 것이든가, 아니면 가위에 눌린 꿈의 다른 방식이라는 걸까?
되돌아간다 또, 되돌아간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새로운 것일까?
함성호 시인 / 낙화유수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시집 <너무 아름다운 병>에서
함성호 시인 / 사상(事象)의 지평선
여기서 핸들을 조금만 오른쪽으로 틀면 그대로 피안이다 도시의 지붕들 위를 날아간 긴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하겠지 나는 그 포물선의 어느 좌표쯤에서 생의 끈을 놓고 있을까
살아 있다는 것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나오면 다시 생은 더 어두운 터널로 나를 채근한다
좌석 버스 안에서 죽은 사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그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썩지만 않는다면 죽음도 옆에 두고 친할 만하다
익사자는 어느 순간 생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뻔한 낙관이지만 나는 그 순간에야 무엇이 보일 것 같다
소는 불이 나면 그냥 서서 타 죽는다 뭐가 모욕적이라는 것일까? 그대로 깊이 무릎 꿇고 싶어진 걸까? 무슨 유혹인지도 모르는 채 만화경에 눈을 붙이고 있는 아이처럼 골몰하여 나는 오직 한쪽밖에 없는
다시 나오지 못할 표면을 미끄러져 떨어지고 있구나
함성호 시인 / 레몬트리
그녀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레몬트리 소금은 슬프게 빛나고 나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천 개의 단어를 사막에 심었다네 바빌론의 강가에서 나는 고백했지 레몬트리 레몬트리, 모든 물결들이 나를 춤추네
-모든 것들이 썩어가고 있네 꽃의 기다림
나는 물의 심연으로 돌아간다네 열매와 함께 죽음과 함께
남자는 도시락에 썩은 음식을 넣고 여자는 상처로 옷을 짓고 있네 레몬트리 나는 돼지처럼 먹고 그녀는 붕어처럼 허기를 탐닉하네
그녀는 이 어항의 사랑을 말한다네 신성한 결혼이 치러지는 이 소풍 그 바닷가, 우리들의 유랑과 늘 함께하던 레몬트리 레몬트리一, 슬픔이 나를 해변으로 몰고 가네
귀에 살이 찌네 별의 언덕에서 사막의 아파트까지 (악취와 함께)
누가 이 바람과 불의 사막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을 건너 찰나지간에 만발하다 져버릴 꽃 슬픈 나의 노래를 기다려줄까?
레몬트리 레몬트리, 사막에 귀기울이며 나는 오래 흐르는 물 속에 있네 꽃과 함께 또 죽음과 함께
함성호 시인 /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사랑은 당신에 대한 나의 기대고, 집은 당신을 위한 나의 일이다. 사랑한다는 행위는 그래서 일이다. 신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일이고, 당신을 위해 차를 우리는 일이며, 당신을 위해 여행을 준비하는 일이다. 집에는 항상 당신이 있어야 하고, 집은 항상 당신을 위해 지어진다.
함성호 시인 / 이 노래를 따라가면 이 노래를 따라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깊은 물속에 갇히거나 끝없는 경계를 떠다니는 어딘지 모르는 섬이 될 것이다 내가 이 노래를 따라간다면 지상에는 시계 소리 같은 눈이 내리고 가재미, 도다리, 도루묵이 같은 것들은 검은빛 속에서 다시 한번 죽음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를 따라가면 거기에는 바다가 있고 여기에는 바다가 있고 거기에는 창문이 있고 여기에는 창문이 있고 거기서는 닿을 수 없고 여기서는 닿을 수 없고 거기서는 갈 수 없고 여기서는 갈 수 없고 거기서도 별 수 없고 여기서도 별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내가 이 노래를 따라간다면 밤은 별이 될 텐데 썰물이 없는 밀물로 덮칠 텐데 하지만 이 노래를 따라가면 한 발 한 발마다 아프지 않을까? 아픔이 나를 알아볼까? 그러나 내가 이 노래를 따라간다면 땅도 찾고 물도 찾을 텐데 도둑도 만나고 철인도 만날 텐데 이 노래를 따라가면 나는 가장 아픈 노래가 될 거야 어떡하지? 이 노래를 따라가면 이 노래를 따라가다 너의 귓바퀴를 돌았지 한 바퀴 두 바퀴 봄과 백발이 있을 거고 바다를 건너는 호랑이가 있을 거고 졸고 있는 비탄이 있을 거다 피곤과 혀가 있을 것이다 이 노래를 따라가면 가벼운 대문이 나타나고 우물을 타고 오르는 계절풍과 물구나무 투구벌레가 사막을 건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노래를 따라간다면 물소리를 타고 연어와 송어가 올 것이고 곰 노루 토끼 고라니 살쾡이 같은 것들도 뒤이어 이 노래의 나무에 달릴 무성한 잎이 되어 너는 꽃이 되어 열매가 되어 이 노래를 따라가면 하나의 씨앗에 담긴 헤아리를 위해 무수한 반복이 숲을 이루고 무수한 상징이 보물처럼 숨겨진 누군가 잠깐 엿보았을 뿐인 그래서 눈이 멀어버린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닌 젖히고 걷고 펼쳤다 닫히는 우연(偶然)이고 연기(緣起)인 능연(能然)이고 필연(必然)인 그래서고 그러나인 나는 이 노래를 따라간다
함성호 시인 / 당신만이 그 집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사랑은 당신에 대한 나의 기대고, 집은 당신을 위한 나의 일이다. 사랑한다는 행위는 그래서 일이다. 당신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일이고, 당신을 위해 차를 우리는 일이며, 당신을 위해 여행을 준비하는 일이다. 일 없는 사랑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과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슬픈 풍경이다. 산골에 홀로 버려진 채 조용히 낡아가고 있는 집들은 얼마나 쓸쓸한 풍경인가. 빈집을 우리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그와 같이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얼굴도 우리를 애잔하게 한다. 사랑이 항상 누구와의 일이라면 집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그 사랑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수 없듯이, 집을 위한 집은 있을 수 없다. 집에는 항상 당신이 있어야 하고, 집은 항상 당신을 위해 지어진다. 좋은 집은 꼭 당신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 『당신을 위해 지은 집』(마음의숲,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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