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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준관 시인 / 넘어져 본 사람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3.
이준관 시인 / 넘어져 본 사람은

이준관 시인 / 넘어져 본 사람은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무릎에

빨갛게 피 맺혀 본 사람은 안다.

땅에는 돌이 박혀 있다고

마음에도 돌이 박혀 있다고

그 박힌 돌이 넘어지게 한다고

 

그러나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본 사람은 안다.

땅에 박힌 돌부리

가슴에 박힌 돌부리를

붙잡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 박힌 돌부리가 나를 일어서게 한다고

 

 


 

 

이준관 시인 / 딱지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칠칠치 못한 나는 걸핏하면 넘어져

무릎에 딱지를 달고 다녔다.

그 흉물 같은 딱지가 보기 싫어

손톱으로 득득 긁어 떼어내려고 하면

아버지는 그때마다 말씀하셨다.

딱지를 떼어내지 말아라 그래야 낫는다.

아버지 말씀대로 그대로 놓아두면

까만 고약 같은 딱지가 떨어지고

딱정벌레 날개처럼 하얀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지금도 칠칠치 못한 나는

사람에 걸려 넘어지고 부딪히며

마음에 딱지를 달고 다닌다.

그때마다 그 딱지에 아버지 말씀이

얹혀진다.

딱지를 떼지 말아라 딱지가 새살을 키운다

 

 


 

 

이준관 시인 / 거리에 가을비 오다

 

 

노란 우산 아래로

장화의 물방울을 튀기며

나는 거리로 나선다

비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자, 나는 들으마, 너는 말하라

나는 외로운가 보다

나는 누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가 보다

풋내기 시인처럼

앞뒤 운이 맞지 않는 네 말소리에

나는 열중한다

얼간이처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나는 외로운가 보다

길가에는 젖은 발들이 흐른다

젖은 발들이 내 쓸쓸한 발등을 밟는다

나뭇잎들이 비의 말을 따라 흉내를 낸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따먹으며,

나뭇잎은 나보다 더 외로운가 보다

항상 나에겐 낯설기만 한 비의 알파벳

이국 처녀의 눈처럼

파란 비 오는 가을 풍경

나는 누구를 방문할 일도 없는데

꽃집에 들러 꽃을 산다

주정뱅이처럼 꽃을 보고

혼자 지껄이는 나는

형편없이 외로운가 보다

 

 


 

 

이준관 시인 / 밥상

 

 

밥상을 받을 때마다

나는 상장을 받는 기분입니다.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나는 날마다 상,

푸짐한 밥상을 받습니다.

 

어쩐지 남이 받을 상을 빼앗는 것 같아서

나는 밥상 앞에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나는 떨리는 두 손으로

밥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밥상 앞에 앉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했는가

참회하듯이.

 

 


 

 

이준관 시인 / 폭설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폭설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그리하여

오직 하늘의 새의 길도 끊기면,

한 닷새 무릎까지 외로움에

푹푹 빠지며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도 좋으리.

 

간신히 눈 위로 남은

빨간 산열매 두어 알로

배를 채우고 가다 기진해서 쓰러져도 좋으리.

눈 위에 누워

너무나 아름다운 별에 흑흑 느껴 울어도 좋으리.

 

곰아, 너구리야, 고라니야, 노루야,

쓰러진 나를 업어다 너의 이부자리에 뉘여다오.

너희 밥솥에 끓는 죽을

내 입에 부어다오.

 

폭설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나는 드디어 산짐승들과 한 식구가 되어도 좋으리.

노루의 눈에 비쳐

푸른 칡잎의 귀가 돋아나와도 좋으리.

 

사람들아, 내 발자국을 찾지 말아라.

그 발자국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이 쏟아지는 폭설에

덮이었으리니,

이미 나는 눈이 길길이 쌓인 숲의 굴 속에서

따뜻한 꼬리털을 베고 잠들어 있으리니.

 

 


 

 

이준관 시인 / 저녁별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다 오는 소년이

저녁별을 쳐다보며 갑니다

 

빈 배 딸그락거리며 돌아오는 새가 쪼아먹을

들녘에 떨어진 한 알 낟알 같은

저녁별

 

저녁별을 바라보며

가축의 순한 눈에도 불이 켜집니다

 

가랑잎처럼 부스럭거리며 눈을 뜨는

풀벌레들을 위해

지상으로 한없이 허리를 구부리는 나무들

 

들판엔 어둠이

어머니의 밥상포처럼 덮이고

내 손바닥의 거친 핏줄도

풀빛처럼 따스해옵니다

 

저녁별 돋을 때까지

발에 묻히고 온 흙

이 흙들이

오늘 내 저녁 식량입니다

 

 


 

 

이준관 시인 / 흙 묻은 손

 

 

내가 사는 아파트 가까이

버려진 땅을 일구어 사람들은 밭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촘촘히 뜨게질을 하듯

심은 옥수수와 콩과 고추들

꿀벌이 날아와 하늘로 꽁지를 치켜들고

대지의 꿀을 빨아들이고

배고픈 새들은 내려와

무언가를 쪼아먹고 간다

 

아파트 불빛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제 가슴의 빈터를 메우듯

호미를 들고 와 흙을 북돋워주고 풀을 뽑는다

옥수수 앞에 후드득 지는 빗방울은

사람들의 핏방울로 흐르고

저녁에는 푸른 별 같은

콩이 열린다

 

흙 묻은 손으로

옥수수와 콩과 고추와 나누는

말없는 따뜻한 수화

사람들의 손길 따라

흙은 순한 사람의 눈빛을 띈다

 

사람들은 흙 묻은 손으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가을이면 흙에서 태어난 벌레들은

식구들의 옷을 기우고 박음질하는

재봉틀 소리로 운다

 

슬프고 외로울 때면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는 사람들

겨울에는 시리고 외로운 무릎을 덮는

무릎덮개처럼

눈이 쌓인다

사람들이 일군 마음의 밭에

 

 


 

이준관 시인

1949년 전북 정읍시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동시 '초록색 크레용 하나'. 1974년 심상, 신인상 시 당선 •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아동문학작가상, 방정환 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펜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2006. 제19회 대한민국 동요 대상. 시집 『황야』 『가을 떡갈나무 숲』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  『부엌의 불빛』 『천국의 계단』 • 한국동시문학회 회장 역임. 영등포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