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채상우 시인 / 그리하여 나는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3.
채상우 시인 / 그리하여 나는

채상우 시인 / 그리하여 나는

 

 

 죽은 사람

 

 이인용 식탁처럼 식탁 위 판유리처럼 먼지처럼 먼지 가득 내려앉은 접시처럼 녹슬기 시작한 포크처럼 나이프처럼 냄새나는 고기처럼 상한 아침 햇살 곪기 시작하는 그림자처럼 썩어가는 시곗바늘처럼 그리하여 나는 고요한 사람 움직이지 않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비밀을 완성하는 사람 그대 내게 다가와 속삭이네 자책과 욕설을 내 움푹 팬 가슴에 깃드는 상냥한 목소리 내 무른 눈구멍에서 날아오르는 종달새들 이인용 식탁에 마주앉아 이제야 말하기 시작하네 그대 크리스탈 잔처럼 찰랑이는 포도주처럼 다시 명랑해진 나이프와 포크와 접시처럼 투명하게 그대 내 짓무른 입술에 키스하네 다정한 아침 햇살처럼 아직 명명되지 않은 혁명처럼 아름답구나 나는 비로소 그리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 처럼 죽은

 

 


 

 

채상우 시인 / 밀서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가 빠져나간 고양이가 있다 킨텍스로 대화공원 앞 삼차선과 사차선 사이 고양이 하나가 꼼짝 없이 거기 있다

 

 고양이는 어디로 가려 했던 걸까 고양이는 고양이를 두고 어디로 훌쩍 떠나갔을까

 

 점점 얇아지고 있는 고양이 점점 얇아지면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고양이 뭐가 그리 즐거울까 고양이는

 

 한쪽 눈이 짜브라진 고양이 마침내 다른 한쪽 눈도 투툭 사라진 고양이 차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물큰물큰 내장을 게워내는 고양이 고양이였던 고양이

 

 고양이는 고양이를 기억할까 나는 왜 애써 무엇인가를 기억하려 하는가

 

 저기에 고양이가 있다

 

 저기엔 고양이가 없다

 

 나를 향해 죽은 고양이가 걸어오고 있다

 

 


 

 

채상우 시인 / 하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푸른 목백일홍을 앞에다 모셔 두고 술을 따른다 사람이 그립다

 

지금은 다만 방금 피어오른 적란운을 최선을 다해 바라볼 뿐이다

 

평생이 종일토록 저물지 않는다

 

 


 

 

채상우 시인 / 미영微影

 

 

오늘은 음력으로 戊戌年 辛酉月 壬子日이다

 

시들고 있는 칸나 위로 앳된 부전나비 둘인 듯 하나인 듯 날아든다

 

生前과 死前은 같은 말이다

 

 


 

 

채상우 시인 / 추일서정

 

 

 점심 먹고 그제처럼 술 먹으러 가는 길 단풍나무 아래 붉은 아직 붉디붉은 저것은 몰라요 난 정말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온등 핏덩어리 저것은 지금도 응결 중인 땅바닥에 납작 달라붙어 난 그런 거 몰라요 정말 몰라요 말 못하는 말 할 수 없는 저것은 술 먹으러 가야 할 길은 아직 한창 남았는데 사는 것도 투쟁이라던 말씀 붉게 타올랐던 그런 말씀 하지 말아요 무서워요 풀기 없는 저것 붉게 바스라지고 있어요 가슴이 떨려오네요 이런 사랑 처음이에요 아직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뜨거워져요 발기하는 기억들 떨어져 얘기해요 저것은 봉기하는 서서히 스멀거리는 저것은 선 끊긴 점조직 죽어 가면서도 기어가는 홉반들 몰라요 정말 몰라요 저것은 혀가 사라진 혀 혀일 뿐인 혀 혀가 아닌 혀 가만히 둘 수 없어 널 널 미안하지만 즐기는 거 다 알아 몰래 웃고 있는 걸 엄마가 화낼 거예요 온 마음으로 길바닥을 핥고 있는 저것은 몰라요 잘라 버린 잘라 내다 버린 내 입속 한가득 뭉클한 왠지 겁이 나네요 난 겨우 블흑인걸요 몽근동근 기억나기 시작하는 저것 점심 먹고 이젠 술을 먹어야 하는데 내 혀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서 썩어가고 있나 도대체 새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도대체 저것은 그래 정말 난 아무것도 몰라요 혀를 찾아야 하는데 혀를 깨물고 다짐하던 그 혀들 점심 먹고 술 먹으러 가는 길 그러나  그리하여 저것은 몰라요 난 정말 모르겠어요, 저것은

 

 


 

 

채상우 시인 / 검은 기억 위의 검은 기억

 

 

 당신은 모르실거야 소철 대신 허브를 기르기 시작한 당신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든 죄악은 낙서처럼 시작됐지 오늘은 첫눈처럼 또 눈이 내려 눈이 내리면 내릴수록 쪼그라드는 성기 난 이제 내가 순결에 대해 말해도 신경쓰지 않아 차라리 당신과 섹스나 할 걸 그랬어 혁대를 끄를 때마다 당신은 말했지 소리 질러 yo yo yo 제 죽음에 대해 기회를 놓쳐 버린 자만이 제대로 죽을 수 있는 법 너무나 해맑아져버린 당신 성북옆 앞 간이 의자에 앉아 이 세계가 다 저물도록 묵주신공을 올리는 당신 당신의 신념은 미농지보다 부드럽고 질기지 난 당신의 총명함이 좋아 당신을 단 한번만이라도 거룩하게 핥고 싶어 당신 내장 깊숙이 내 혀를 집어넣을래 두려워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내년엔 기필코 봄이 올 거니까 손금을 바라보며 이빨을 갈아 본 자는 알 거야 자살할 시간은 넘치도록 많다는 걸 언제로 돌아가야 하나 내 죄가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내가 빠져나온 구멍들에선 매번 누룩내가 나곤 했지 괜찮아 맨 처음 구멍도 그랬으니 까 왜 그렇게 심각해진 거야 난 당신을 버리지 않아 당신이 나를 증명해줄 수 있든 없든 마음이 서글플 때나 초라해 보일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꾹꾹 눌러 줘 나 거기 서 있을게 난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이니까 당신의 하나뿐인 아버지니까 매일 밤마다 한 움큼씩 털이 빠지기 시작한 당신 나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 그런 당신을 기억할래 필사적으로 바닥에 이르른 시간들 비로소 칠요성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모르실거야 모를 거야 죽어도 죽지 않는 당신 당신을 가까스로 깨닫기 시작한 나는

 

 


 

 

채상우 시인 / 回音

 

 

 아까는 오월 초순치곤 좀 더웠는데 지금은 약간 흐리다 길 건너 돼지국밥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씩 나오기 시작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어려 보이는 선생님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넌다 건너선 아파트 단지 속으로 팔랑팔랑 뛰어간다 올해 나비를 보았던가 가물가물하다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천천히 다가온다 유모차 속의 조그마한 개도 늙어 보인다 육 년 전까지 십육 년을 함께 살다 죽은 개가 보고 싶어졌다 사람들도 몇몇 보고 싶었지만 다만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립다는 말도 하마 저물어 간다 케이크와 카네이션을 사 든 쌍둥이 여고생 둘이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고개를 들면 그때마다 느릅나무가 수천장찍 잎들을 나부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처음 본 남자가 맞은편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었는데 어느 순간 사 라졌다 라일락은 시들고 있지만 구절초가 자라는 중이다 한동안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는데 여전히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채상우 시인 / 변두리 연대기

 

 

언제나 나는 변두리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예전 외사촌 동생은 끊임없이 서울에 대해

묻는다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한 십팔 년쯤

초등학교 육학년 때 낮은 포복으로 기어오르던

삼양동 달동네를 서울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기정학 당한 미아리고개를 보여주기엔

아직 어렸다

팔팔올림픽이 이루어 놓은 팔팔한

천호동 뒷골목은

구겨진 습자지에 적어 내린 연서

보이지 않는 공포로 우리를 엄습하던

군화 아래 서울은

잘도 도망다녔다 종로에 서면 을지로로

을지로에 서면 지하철을 타고 명동으로

때론 왕십리에서 헛다리짚기도 했다

그사이 두어쪽 넘기다 만 시집 속으로

애인은 걸어들어갔고 다시 읽어야 할 시간이

완전무장으로부터 무장해제까지 삼 년을

기다렸다 기다림 끝엔

저 먼 사막의 요술거인이

분노와 슬픔과 참회와 타협을

석 달 치 제조해 주었고 서울은 역시

잠복할 만한 장소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

雨水에 눈이 처연스레 내리는

서른, 내가 설 수 있는 곳은

변두리밖에 없음을 외사촌 동생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이 지루한 리얼리즘을

용서해 줄 수 있을까

 

-『현대시』 2022-2월(386)호

 

 


 

채상우 시인

경북 영주 출신. 2003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 『멜랑 콜리』 『리튬』 『필』. 현재 (주)천년의시작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