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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재형 시인 / 가을 사용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3.
조재형 시인 / 가을 사용법

조재형 시인 / 가을 사용법

 

꽃들이 조제한 향기를

단숨에 복용하지 말 것

마무리 공사다망할지라도

바람이 편집하고 출간한 숲의 페이지를

섣불리 넘기지 말 것

정차 중인 사랑에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 것

찾아오는 외로움을 문전박대는 말되

쓸쓸함을 남용하지는 말 것

때로는 계급장을 떼고 무릎을 꺾어

민들레의 작은 동료로 백의종군할 각오를 새길 것

분에 넘치는 의자를 넘보지 말도록

자신한테 일침을 가해 달라고

맑은 구름에게 청탁을 일삼을 것

겨울이 조기 전에 땔만이 될 만한

따뜻한 감사 한 다발 신께 받칠 것

 

 


 

 

조재형 시인 / 근황

 

 

내 눈물은 구름 되어 하늘을 떠돌아요

그날 아침 떠나온 운동장을 기웃거려요

하루도 거르지 않던 골목을 스쳐 가죠

우리 집 옥탑방은 빗방울로 다녀오곤 해요

 

내 미소는 가슴을 짓누르는 바위덩이로 자리를 잡았어요

당신들이 밭은기침을 내뱉을 때면

나는 파도처럼 출렁거리죠

기울어진 지축처럼 내 이름이 버거운가 봐요

주저앉는 날이 부쩍 많아진 엄마

저러다 그녀의 남은 生도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겠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봄부터 집필 중인 슬픔 한 권의 주연이 되었어요

이 대하소설의 결말을 화자인 나도 모르겠어요

신간으로 다른 고통은 더 이상 출간되지 말기를,

바다를 베고 잠든 긴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요

나를 두리번거릴 책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밟고 나갈 길이 안 보여요

 

안부 대신 추억 한 송이 꺾어 보내요

누구라도 꽃병이 되어 수령해 주었으면

우표는 눈물 한 방울로,

문드러진 원망은 동봉하지 않을게요

불순한 밤이 키운 꽃대인지라

아빠의 깡마른 한숨을 먹고 자랐데요

개봉하면 향기로 재생될 거예요

답신은 이심전심으로 갈음할까요

 

 


 

 

조재형 시인 / 지문을 수배하다

 

 

 글구멍이 막혀 살아온 농투성이, 말년에 인감을 내러 면사무소를 찾았다. 직장에서 말소된 자식의 생계를 복원해주려 남은 천수 답을 내놓은 것,

 

 맨몸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랴 중노동이 열손가락을 갉아 먹었다. 십지문이 실종되었다고 민원은 반려되었다. 고추 먹은 소리로 삿대질을 해본들 소용이 없다.

 

 몰락한 가문의 정본으로 태어난 노인, 가난을 대대로 복사한 탓에 사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이면지처럼 남의 집 헛간을 전전 하며

 

 노인을 진본으로 탁복한 곳은 땅이다. 논배미 밭고랑 갈피마다 삽과 괭이로 밑줄을 그었다. 땀방울로 간인한 흔적들이 그를 소명 한다.

 

 팔순 고개 완등하고 유효기간이 다해가는 상노인. 올봄도 황소가 끄는 쟁기에 첨부되어 논두렁으로 출석했다. 부록으로 어깨에 맨 삽날이 지문처럼 문드러져 있다.

 

 


 

 

조재형 시인 / 시집의 기원

 

 시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고, 시인이 된 것은 불운이었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모두가 고독이라는 이상한 지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이다. 그들은 수백만 개의 반란 바이러스와 의심과 불만의 질병을 몸에 지닌 채 거짓말을 훔치러 진실을 뒤지고 다닌다. 그들은 다들 몸속 깊은 곳에 커다란 슬픔을 감추고 있다. 슬픔보다 더 깊은 강 하나씩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다. 굽이치는 내면의 강에서 범람하는 슬픔을 대신 저장해둘 적절한 집을 찾고 있다.

 

누군가는 그 공간을 시집이라고 했다.

 

 


 

 

<산문>

조재형 시인 /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

 

 

 늙어가는 집을 시골에서 찾았다. 오래전 타계한 피상속인 명의로 등재된 집은 망자보다 더 늙었다. 워낙에 폐가라서 허물고 다시 짓는 편이 나을 듯싶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집을 나간 뒤 소식이 없다. 저승의 노인이 가옥대장에 둥지를 틀고서 이승의 집을 지키는 중이다. 떠난 주인의 남아 있는 상속인을 찾아냈다. 그 형제들에게 번갈아 연락을 시도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라 시세라는 것이 형성될 리 없다. 집값보다 개보수 비용이 몇 곱절 더 들어가게 생겼다. 그렇다고 거저 넘겨달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당국이 멋대로 매겨놓은 공기가액을 값으로 쳐주겠다고 넌지시 제의했다.

 

 그놈의 가격이라는 것이 매수인으로서는 지급하기 아까운 금액이고, 옛 주인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서운한 금액이렷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년의 서사가 송두리째 담겨있는 대하소설 같은 전집인데···. 상속인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집이 털리건 넘어가건 안중에도 없다. 우선은 쳐주는 집값이 뜻밖의 횡재라는 눈치이다. 인수하는 나도 세월의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다가 팔려 가는 유기견처럼 집의 모양새가 애처로운데, 정작 주인집 도령은 서운한 기색을 안 보인다.

 

 집은 이제 내일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제 속에 자신을 맡긴 채 추억을 옹호하는 데만 온 힘을 다하고 있다. 거쳐 간 식구들의 흔적을 그 몸 안에 지니고 있다. 집을 바라보는 이들은 두 부류로 갈라졌다. 하나는, 재산 가치로 보는 사람이다. 귀신이 뛰쳐나오게 생겼다고 손사래를 친다. 내 어머니와 통장님이 그들이다. 또 하나는, 추억의 깊이로 헤아리는 사람이다. 마을 사람 누구라도 만나게 되면 칸칸마다 품고 있을 사연을 캐묻는다. 나외 뜻을 같이하는 동인이 그들이다. 양쪽 모두 집의 속내와는 무관한 평가이다. 하지만 집은 그 어느 쪽도 포용하리라는 자세이다.

 

 나는 끝도 없이 집을 향해 묻고 또 묻고 싶어진다. 왜 여태껏 쓰러지지 않고 나를 기다려 왔는지. 집이 나를 통해 어떤 꿈을 이루려는지. 월척을 낚아 횡재한 나는 집의 몰골에서 측은지심을 읽는다. 화려한 칼라로 길든 나에게 흑백의 담백한 세계를 제공한다. 어떻게 늙어가야 하고, 어떻게 침묵해야 하며, 어떻게 낮아져야 하는지 집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온갖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짐승처럼 집은 생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한때 사람을 안고 키웠던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 있다. 문패가 그 흔적을 대변하고 있다. 내부의 모든 장기가 기능을 멈추고 마지막 숨결처럼 바람이 약하게 드나든다. 바람마저 한 점 없다면 집은 사망신고가 내려질 것이다. 근력을 거의 상실한 집에서 턱수염처럼 자란 잡초가 반갑기까지 하다. 스피커를 점검하듯이 대문 안쪽에 대고 말했다.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아무도 없느냐고요!

 아무도 없다는 걸 증명하듯 아무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조재형 시인 / 탑승거부

 

 

시어머니를 전도하는 며느리

교회에 나가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목소릴 높인다.

돌아가신 아버님도 그곳에 계실 거라고.

 

듣고 있던 시어머니 정색을 한다.

 

-며늘아, 천국에 가면 늬 시애비 있다는디

-그 양반 다시 만나는 천국이라면

 

-내는 거기 안 갈란다.

 

 


 

 

조재형 시인 / 쉰을 진술하다

 

 

 무더운 여름날이다. 젊은 아버지 손수 흙집을 짓다. 읍내 보건소를 다녀온 후 몸져 눕다.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를 뿌리치고 떠나다. 유복자인 막내 슬픔이 새 식구로 들어오다.

 

 이른 봄날이다. 누님의 손에 이끌려 학교 문턱을 넘어서다. 생전 처음 수많은 이성을 접하고 놀라다. 험난한 줄서기를 처음 배우다. 행복은 점수순이라는 걸 아울러 익히다.

 

 청명의 초저녁이다. 진로에 회의를 품고 담배를 피우다. 군대 영장을 내림받고 머리를 깎다. 입영 전날 뚝방촌 여인숙에 홀로 버려지다. 난생 처음 여자를 일독하다.

 

 하짓날 한낮이다. 데모하는 갑장들과 적이 되어 싸우다. 이유도 없이 선임에게 두들겨 맞다. 개새끼라는 방언을 처음 입에 올리다. 개 같은 군대를 전역하다.

 

 시린 가을이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공복의 길에 접어들다. 배당받은 첫 사건의 신병을 처리하다. 쓸데없는 죄책감에 잠을 못 이루다. 천직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 예감하다.

 

 꿈 같은 날이다. 출가를 꿈꾸던 중 인연에게 발목 잡히다. 신혼여행 중 카메라에 담은 추억을 분실하다. 딸의 출산을 지켜보며 환희를 체득하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놀라 방황을 접기로 결심하다.

 

 붉은 만추 무렵이다. 제주 섬으로 유배되어 육친과 떨어지다. 식솔들 눈에 밟혀 밤마다 소주에 몸을 싣고 출렁이다. 관사에 일찍 버려지기 싫어 야근에 매진하다. 속모르는 조직에게 모범으로 치하받고 쓸쓸해지다.

 

 눈발이 지구를 내려치는 동짓날이다. 매형이 운명에 일격을 당하고 요절하다. 몰아닥친 사별에 가화만사성이 무너지다. 장지에서 구두를 분실하나 망인이 타고 간 것으로 자위하다. 사고 원인을 밝혀낸 날 꿈 길에서 대면하다.

 

 절망이 고인 봄날이다. 오랫동안 개종을 노리다 직업만 바꾸다. 밀려오는 형용사 틈에서 접속사로 전전하다. 좌절의 막후에서 기울어가는 꿈을 긍정으로 버팀목하다. 사랑 앞에선 여전히 머뭇거림으로 일관하다. 그 후로도 번번이

 

 


 

조재형 시인

전북 부안 출생. 2011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 제15회 푸른시학상을 수상. 포지션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