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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승민 시인 / 가을의 유작(遺作)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6.
신승민 시인 / 가을의 유작(遺作)

신승민 시인 / 가을의 유작(遺作)

홍역 같은 비를 따라 귀순하는

한 조각 플라타너스 낙엽의 무게로

손뼉 치는 사랑도 없이 가을은 왔다

능선마다 사직을 일으키는 녹림은 지고

망국의 기치처럼 나부끼는 빛바랜 버들가지

덧없이 뿌린 장사의 피만 만산에 낭자하다

옛길 위로 유연처럼 피어난 코스모스 드높게 날아

별을 갈아 만든 흙에 뿌리는 내리고

효시 같은 낮달 드높게 날아

지엄한 하늘의 적통을 끊었나니

얼기설기 야심처럼 번져가는 단풍을 탄식하듯

순명한 바람은 돌 속에 권세를 묻고 떠났다

왜소한 행려처럼 나뒹구는 잡초들과

살수같은 그늘에 잘려나가는 빛의 수급

아직도 율법 잃은 계곡을 천하로 알고서

가병처럼 으스대는 가재의 집게발이 처연하구나

어느 시절에야 이 모든 흥망들이 잠들 수 있을까

어느 세월에야 저 뭉툭한 슬픔들이 꽃피지 못할까

오래 묵은 강물이 큰 산의 쇄골을 닦는 시간

문상을 마친 수척한 조객처럼 비척거리며

오늘도 강은 먼 산굽이를 흘러, 흘러서 간다

가을아 제가 온 길의 아픔을 아느냐

거적 밖으로 나온 시신의 발목같은 시림을

가을아 너는 너의 유작을 알고 있느냐

맴도는 초가처럼 그립고도 가슴 아린 풍경들을

 

-제17회 의정부 문학공모전 에서

 

 


 

 

신승민 시인 / 가을 수로水路

 

 

물인지 금속인지 모를

묽은 것들이 흘러간다

 

피의 수심水深은 깊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한 점 빛이 가라앉을 때까지도

심중心中에 닿지 못한다

 

비치는 것은 그늘

가끔 갈망渴望이 떠 있다

상처 나거나

죽어 뒤집어진 채로

 

꼴깍꼴깍

동맥動脈을 삼키는 밤

정적靜寂이 한 팔을 내어준다

철새 날개에 달그림자가 멎는다

 

대를 걷는다

먼 길이 유유悠悠하다

시절 몇 잎이 떨어지는지를

세어 보다 말았다

 

진흙 속의 표정들

가을은 머물지 않는 자의 것이다

-계간 『문예바다』(2022년 겨울호)

 

 


 

 

신승민 시인 / 실족失足의 세월

 

 

 빌딩 숲 위로 하늘이 가라앉는다 비구름의 침몰이다 하늘의 살은 찢어져 산과 바다를 먹이고도 남음이라 서있는 사람마다 타관他官에서 죽을 먹나니 공허를 씹는 물에 비치는 건 신도 인간도 아닌 영락零落한 나무들 뿐이로다

 

 눈멀었다 하니 청춘 눈감았다 하니 천리千里어느새 세월의 퇴적은 회한悔恨의 삼각주를 낳았구나 설익은 계절에 부르튼 잡초에도 물은 흔들리나니 길은 잔도棧道요 바람은 육필肉筆이라 끊어진 생의 마디마다 써내려간다

 

 황혼에 녹아내리는 고드름이여 묘원墓園의 고독을 깨우는 세찬 비여 쥐가 까마귀를 물고 풀들이 뱀을 짓누르니 취하지 않아도 모든 주장이 즐겁다 천마天馬가 운구하는 녹슨 관에서 가쁜 생의 불빛들은 옹기종기 속닥거린다

 

-『미네르바』 2022-봄(85)호

 

 


 

 

신승민 시인 / 남정南征

 

중추仲秋에 앞집 감은 익고

감잎은 시들고 있다

바람이 문을 걸고 종생終生을 지킨다

한 덩이씩 타버린 이 모자란 계절이여

철없이 대문을 치던 쇠문고리조차

수심이 난만爛漫한 나날이다

남은 생은 늙고 섧은 투계鬪鷄의

마지막 분전奮戰, 그 이슬방울이

개도 걷기 싫어하는 그 길에 흩뿌려진다

길은 다시 인간을 인도한다, 향도嚮導여

내 옥간獄間 같은 이승의 간수여

바깥의 기쁨을 이 생에 누설치 마라

모두가 무사하고 무탈한 세월에만

이교도異敎徒는 서로의 품에 주둔한다

 

 


 

 

신승민 시인 / 외지인外地人

 

저무는 겨울 내리는 비는

누구의 영욕榮辱을 몰고 오는가

말도 발도 없이 두드리는

마음의 극단極端이여

응어리진 세월이

생生을 가라앉히는 때

껍질을 깨고 내미는 백골白骨의 새들이

파릇하도다

찬 강江 하늘에 주석을 다는

적막寂寞의 날갯짓에

산도 곡기穀氣를 끊었다

새벽안개는 고아의 초막草幕

스릉스릉 어스름이 길을 잘라서

먼 구름의 달을 적시는

한 소절 바람조차 듣지 못한다

외지外地에는 꽃과 들도

피로 쓴 집권執權이요

무덤이 호시절을 유인誘引하나니

봄은 가을의 신민臣民이로다

어제 쓰다듬은 토끼는 귀가 없고

오늘 목을 벤 사슴들은 눈이 없다

슬픔의 깃털이 모두 빠지자

사람은 혀를 잃었다

 

 


 

 

신승민 시인 / 선유도

 

 

이젠 모든 번성이 고단하구나

단념한 채 물줄기를 가르고 앉아 있는

깊고 그늘진 비석

한 시절 유행병 같은 사랑에 미쳐

몸서리치듯 공허를 앓던 추억

지금쯤 가만히 회상하는가

가고 못 올 빛살로 족적을 지우는가

때론 사슬에 잠긴 눈매로

돌무덤에 누운 하류를 그리워하는가

저물녘이면 소문처럼 장벽이 자라나고

일상의 손질들이 하소연을 파헤치는

폐기된 기밀機密의 섬

네게 면역되지 않는 매혹을 주고 싶다

종신토록 유효한 형식을 주고 싶다

너를 오독誤讀하는 모든 이에게

생의 중턱에 체류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

어떤 기호로도 암시할 수 없는

부화孵化시킬 수 없는 풍경이여

능지기처럼 삭은 기계들의 숲에는

유실된 바람이 사후死後를 생각하고

차마 어감을 새겨둘 시간도 없이

연기 같은 하루는 흘러가는데

가위 눌린 새 한 마리

수수꽃다리에 앉아

잠든 근조謹弔의 깃을 턴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신승민 시인 / 애소哀訴

 

 

 강변 바윗돌에 사람들이 슬픈 유물처럼 걸터앉았습니다 막 피어나는 꽃들에게선 타오르는 사초史草의 냄새가 납니다 소라 모양으로 기어가는 구름은 부스럼 앓는 허공을 신중하게 검시檢屍합니다 더는 회생할 수 없는 그늘도 흩날리는 찬미讚美에 마지막 몸을 적십니다 봄바람을 타고 가파르게 번지는 것이 다름 아닌 살의殺意라는 걸 저물어가는 방패연은 알고 있을까요

 기름 속으로 가라앉는 거미의 눈물처럼 풀냄새는 또다시 부서지고 내상內傷 입은 물길은 놀빛을 경건하게 운구합니다 흙먼지를 머금은 채 무심코 안도를 내쉬는 연인이 그림자로 흩어집니다 단비마저 없는 오늘 찾아오는 사랑은 밝혀지지 않을 야사野史로 기록될 것입니다 서로를 기다리며 한 생의 모멸을 견뎌왔다는 점에서 당신과 나는 다정多情을 모의한 공범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신승민 시인 / 청혼

 

 

 믿음 없이 준 축복은 이별보다 먼저 시들어갑니다 저녁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차례입니다 개들은 눈이 얼어 구름이 일 때까지 이승을 떠돌고 있습니다 비탈마다 꿈결처럼 자라나는 기억의 나무여 잎에 쓰인 한 떨기 그늘은 누구를 향한 언약입니까

 

 가끔 서럽기도 하는지요 당신은 떨쳐낼 수 없는 오해와 미움의 꽃 비밀감옥 속 연기처럼 흐르는 목소리 한 줌 흰 산에 범 울면 남쪽 하늘이 타고 비 적신 무덤 위로 사위어가는 새들의 만장輓章 당신 가고 붉어진 여울은 괴롭지 못해 슬픈 고백입니다

 

 깎자마자 부러지는 연필심들을 모아둡니다 눈물이 모여 체념으로 번지듯 뼈 맺힌 이름을 영원 새긴 별마디에 보냅니다 당신 오시는 그날에 조야한 내 가슴 뻐근해지리니 대지로 밀려드는 용서는 속절없습니다 죄의 바람에도 우리 기어이 사랑입니다

 

-계간 『한국미소문학』 2023년 여름호 발표

 

 


 

 

신승민 시인 / 한 시절

 

 

 바람 치는 회화나무 아래 세속이 있었다

 그늘을 다독이는 햇빛은 조용한 기쁨이었다

 먼 당신이 지옥처럼 그리운 세월

 지나온 시간의 각막은 두터워지고

 두 눈 파래진 가솔家率들은 측은하니

 깨진 모래톱이여, 길에 길이 내리는 낮이여

 네 환부患部는 모르는 채 기교만 늘어

 남향으로 꺼져가는 강물을 독대하면

 저녁의 이목구비 으스러져 낙망落望하고

 아군 없는 장난감 놀이는 그만 끝나고

 

 우리 더불어 한 시절을 난독했다

 모든 본론이 측은했다

 빈혈처럼 서로를 무겁게 할 때

 석양은 빈곤의 인과因果를 머금고 부서졌다

 

 망가진 하루의 늑골 속에 기생하는 청춘이여

 감염목感染木 같이 영예로운 삶은 자라나니

 

 네가 가장 꽃피는 계절에 소리 없이 죽어가는 한 생을 그려낼 때, 나는 목 놓아 울고 싶던 어둠 속 날들에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산새가 물에 젖는 속도로 하늘이 흐려졌다

 

 마음이 아닌 곳에 사랑이 있었다

 

-계간 『시와반시』 2017년 가을호 발표

 

 


 

신승민 시인

1992년 서울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졸업. 2015년 《심상》, 《미네르바》로 시 등단, 2016년 《문예바다》로 평론 등단. 시집 『죽은 시계를 차는 밤』, 장편소설 『權道, 勢家의 길』, 『主君과 宰相』 등. 제45회 천마비평상, 제17회 의정부 문학 대상, 제1회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문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