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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진은 시인 / 물방울 속으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6.
손진은 시인 / 물방울 속으로

손진은 시인 / 물방울 속으로

 

 

초여름 하오 산책길

오늘 내게 놀라운 사태事態는

연 이파리 위

소리 물고 파닥이는 물방울을 보는 일

 

제 몸에 똬릴 트는

하늘도 해도 털어 내며

굴러 내리는 맨얼굴의 말 알아듣는 일

 

바람이 건듯 불어 청개구리가 건너뛰면

또그르르르

한번 또 투명한 심장을 깨는

그 가벼움의 빛 가슴에 점등하는 일

 

머물던 세상, 손 탈탈 털고

한방울 바다의

중심으로 뛰어드는 일

밀어라 밀어라 바람아

전율하는 이 가슴을

 

수평선을 기울였다 펴는

세상 가장 아찔한 상쾌 속으로!

 

 


 

 

손진은 시인 / 성城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어떤 부자로부터 지어집니다

사월, 개나리 꽃망울이 도열한 길가인데요

발밑엔 함성이 막 간질거려요

들리나요 땅속 푸른 군사들의 소리

 

불콰한 얼굴 탱탱한 체구의 아비가

몸을 반쯤 구겨 앉은 등에

서너 살 단추 눈을 가진 어린것이 사뿐, 올라탄

오래된 일층 위에 두 팔 벌려 새 층을 얹은

복층複層의 성

 

망루라고도 하는 위층에서

말발굽 같은 노래 들리면

입이 귀에 걸리는 아래층에선

저 고대적 장수의 위엄도 몸을 두드리죠

 

데워진 공기 속에 섞이는 웃음소리, 말소린

베어도 베어도 자라나는 파란 풀들의 향기

 

둘러쳐진 봄의 심장 속으로 떼어놓는

저 걸음 때문에 해는 둥둥 높고

길섶 노란 민들레 꽃씨는 날고

하늘은 또 손 내밀어 그 얼굴을 쓰다듬고

 

이 해의 가장 부신 햇살이

어깨 위를 흘러넘치는 성채가

철물점을 지나 지물포와 약국을 돌아

라일락 만발한 비탈을 올라가요

 

검은 구름의 군사가 몰려와도 무서리

눈보라의 화살에도 끄떡없을

저 게 수천수만 년을 건너온

무너지지 않을 성벽이라는 듯

 

『다층』 2023. 여름호

 

 


 

 

손진은 시인 / 너의 얼굴

 

새벽,

이역만리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결려온 전화

 

몽흐자르갈, 이 시간에 무슨 일?

루즈도 바르지 않은 입술

헝클어진 머리, 알 수 없는 공기로 출렁이는 방안

 

일이 어려운 거야? 재차

물어도 깨어졌다 이어붙인 항아리

그 틈으로 엿기름처럼 고인 액체가 밀려나올 듯한

멍든 네 얼굴

 

바타르는? 수척한 안부를 물으려는데

기어코 세상을, 신을 저주하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말의 거품, 거품을 무는

네 얼굴

 

그러고 보니,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가마니 짜는 공장에서 번 학비로

D시에서 한국어교육 학위를 받게 한,

현지 한국유학원이 성황을 이루고

8년을 기다려 구더기같이 덕실덕실한 쌍둥이 낳아준

 

그림자, 남편 바타르가

손 쓸 새도 없이 확진 여드렛만에 팬데믹으로

나무 둥치같이 쿵, 쓰려졌다는

소식 뱉으며

아비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기어다니는 두 아들 애써 안으며

 

밤이 넥타이처럼 목을 조른다고,

그때마다 나무가 쓰러지는 숲 꿈을 꾼다고 중얼거리는

급한 파편들을 이어붙인,

둠벙 아래쯤서 고인 마음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올 듯한

네 두툼한 얼굴을 보는데

 

지지직, 통화선을 붙들고

찢긴 바람이 펄럭이며 우는 소리가 막 들린다

 

『다층』 2023. 여름호

 

 


 

 

손진은 시인 / 숲

-序詩

 

 

부챗살모양 잎을 늘어뜨린 채

큰 나무가 그늘 드리울 때

작고 앙증한 줄기 끝에 여린 잎들이며 꽃을 매단

어린것들 날아오르려 퍼득거린다

솟아오르고 누르려는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이 두근거리는 몸짓들 사이로 스며들어

그 속에서 자라는 죽음이며 상처까지를 어루만지는 햇살

전율하는 숲이 반쯤은 솟아오르고

반쯤은 스스로를 억누를 때

열려진 사물들 속에서

잎파랑처럼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떠는 모든 육체들

그 힘으로 구름은 하늘에 천천히 흐르고

그 힘으로 가볍게 떠 있는 공중의 새들

 

 


 

 

손진은 시인 / 이럴 때 내 몸은 그 문을 활짝 열어

 

 

덥다 덥다

이럴 때 내 몸은 그 문을 활짝 열어

땀이란 놈을 내어 보낸다

땀은 그 속에서 오래도록 나오고 싶어

안달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 미세한 숨길 따라

갇혀 있던 그들이 크게 한번 숨쉬고

싶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살살 간질이며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무리들

흙속에 갇혀 어린 풀줄기들 봄이 되면

쏙쏙 고개를 내어밀듯이

그래서 숲을 이루듯이

땀은 얇은 막을 만들어

포장지로 싸듯 몸을 휘감는다.

안과 밖이 서로 바뀌는 순간이다

편안함 집 속에 나는 나의 몸을 맡긴다

이럴 때 우리 영혼은

그를 늘 싸안고 있는 몸에게 미안했던지

한번쯤 몸을 감싸고 싶어

땀을 보냈던 것일까

한번쯤 몸을 위해 밖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손진은 시인 / 혀

토굴 속

묘법연화경 외는 걸 업으로 삼았다는 스님,

사흘 주린 범이

몸뚱이 다 먹고도 끝내

입 대지 못했다는 혀다,

부르르르 소름 돋은 고요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돌아오도록

붉고 연한 혀*

향기 속의 향기가

뭇생들의 귓바퀴에 흘러들어 말들을 기른 걸까

개울물 구르듯 달빛 퍼지듯

죽은 채로 산

노승의 푸른 음성들을

초목에게 바람에게 별에게

먹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 절터에는 아직, 붐빈다

* "三周寒暑 舌猶紅軟". 『삼국유사』 제5권 「혜현구정恵現求靜」

 

 


 

 

손진은 시인 / 블랙 시크릿​

 

 

중풍 걸린 늙은이가 잠든 방

밤새 얼어붙지 않으려고

추위 오소소 돋아난 딸들을 데리고

어미는 거기로 들어온다

둥근 아궁이,

그 입구엔 눈을 가리고 숨은

불씨들

온기를 보내는 재이불을

덮고 눕다

홀라당 옷이 다 벗겨진

귀여운 딸들도

노곤한 졸음에 곯아떨어져

재단사 쥐들에게

등과 가슴골을 훤하게 파인

검은 블라우스를 잘 차려입은

소녀도 있었다

블랙 시크릿,

한껏 뽐낼 거울이 없는 게 아쉬운

오골계 아가씨들

건너편엔 소가,

호수가 고인 수정 窓으로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는 아침도

아침상엔 때 아닌 죽이 올라오는 날도 있었다

몸을 그렇게 시원하게 드러낸 블라우스를

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손진은 시인

1959년 경북 안강 출생. 경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및 同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돌〉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 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그밖의 저서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한국 현대시의 정신과 무늬』 등. 현재 경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