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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애송 시인 / 돌의 기운을 누르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6.
백애송 시인 / 돌의 기운을 누르고

백애송 시인 / 돌의 기운을 누르고

 

 

흙의 기운을 눌러

단단히 박힌 뿌리를 흔들 수 있을까

 

꼭꼭 씹어 삼킨 단어들이 역류한다

 

우리는 세상에 왔다간 비정규직

 

덜 자란 시간들이

주저앉은 마음을 다독일 수 있을까

 

취한 도로에는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사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 질 녘 실그림자로 이어진다

 

상처 주지 말아요

상처 받지 말아요

 

버려진 반지는 수신인이 없고

 

오해를 이해로 바꾸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이다

 

주인 없는 반지가 굴러가는 밤

 

돌의 기운과 뿌리의 기운들이 모여

세상의 단어들을 꾹꾹 눌러 밟는다

 

변경된 계획은 여전히 미완성이고

 

 


 

 

백애송 시인 / 돌탑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하루를 놓아주고 돌아오는 길, 지나온 돌탑 위에 백 원짜리 소원 하나를 쌓아 두고 온다

 

 돌탑에 돌을 올리다 누군가 쌓아 놓은 탑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불안해지는 순간이 있다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에서

 

 


 

 

백애송 시인 / 쓰나미 같은 시간 속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쓰나미 같은 시간 속에

나는 서 있다

 

노란 선에서 핸들을 돌린

그 순간,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면허증을 보여주는 손이 부끄럽다

 

종이컵은 사라지고

커피만 흐른다,주르르

시간이 식어간다

 

점검 중인 엘리베이터

십층까지 걷는다

걷다 쉬다를 반복한다

걸어야 산다

 

가방에 있던 우산

책상에 두고 나온 오후

내리는 비,내리는 것들

다 바닥으로 꽂힌다

 

늦여름을 울어대는 귀뚜라미

초가을의 매미 울음소리

비 그림자 사이,지저귀는 참새

물을 주지 않아도

초록은 저 스스로 자란다

 

간밤에 봉지를 열어놓은

바게뜨 같은 아침

 

―『시산맥』 2017년 봄호

 

 


 

 

백애송 시인 / 신호의 영역

 

 

바닥에 닿는 면적이 점점 좁아졌다

 

신호체계를 무시했다

지킨다는 건

지키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므로

 

발뒤꿈치를 들고 크기를 가늠했다

닿을락 말락 흔들렸다

 

위태로운 영역을 지키는 것은

깊은 산속 빼곡한 나무를

헤아리는 것만큼 어려웠다

 

신호는 전복되었고 나는

날마다 누군가 당겨주길 기다렸다

언제든 튕겨져 나갈 태세를 갖춘채

 

뒤집힌 글자들은

난해한 글자들과

손을 잡았다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는

에너지가 발휘되지 못했다

 

깜박이는 빨강 앞에서

더 빨강을 기다렸다

 

-시집《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걷는사람

 

 


 

 

백애송 시인 / 바이러스

 

 

한 계절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지켜야 할 거리를 가까이 두고

 

처음인 것들이 많아서

하루에 한 가지씩

손에서 놓친다

 

구피 어항에 거북이 먹이를 주고

일요일 같은 월요일을 보낸다

 

무사히 하루를 넘겼다는 소심함

 

거리와 거리를 사이에 둔

어색한 침묵은

균열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 씨앗을 뿌리고

내일 싹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

 

설렘과 두근거림이 지나간 자리에

빈 봉지만 남았다

 

-시집《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걷는사람

 

 


 

 

백애송 시인 / 은행잎

종일 놓치고 말았다

잘못 쓴 가면처럼

이름은 낯설어져 가고

어느 골목

두 팔은 허공을 맴돌았다

밟히고 밟혀

은행잎이 가루가 될 때까지

희미한 아우성이 들려온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그리고 저 아래로부터

쏟아지는 노란 빛 아래

부서져 가루가 된 사람들

이름이 있으나 호명하지 못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사라져 버린 이름들

 

 


 

 

백애송 시인 / 희망을 희망이라 부를 때

 

 

꼭꼭 씹어 삼킨 단어들이 역류된다

 

우리는, 세상에 왔다간 비정규직

 

돌의 기운을 누르고

흙의 기운을 눌러

단단히 박힌 뿌리를 흔들 수 있을까

 

덜 자란 시간들이

주저앉은 마음을 다독일 수 있을까

 

취한 도로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사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질녘 실그림자로 이어진다

 

상처주지 말아요

상처받지 말아요

 

버려진 반지는 수신인이 없고

오해를 이해로 바꾸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이다

 

주인 없는 반지가 굴러가는 밤

 

돌의 기운과 뿌리의 기운들이 모여

세상의 단어들을 꾹꾹 눌러 밟는다

 

변경된 계획은 여전히 미완성이고

 

-계간 《열린시학》 2019년 봄호

 

 


 

백애송 시인

2016년 《시와 문화》로 시 등단. 2016년 《시와 시학》으로 평론 등단.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연구서 『이성부 시에 나타난 공간 인식』. 2020년 광주문화재단 청년예술인창작기금 수혜. 현재 광주대학교와 목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