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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동인 시인 / 가을, 정방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6.
서동인 시인 / 가을, 정방사

서동인 시인 / 가을, 정방사

 

큰 근심도 작은 근심으로 가라앉는 정방사 해우소,

들창에 매달린 가을풍경에 취해 노랗게 물든

제 안의 즙을 배설하다가 금수산 절간처럼 벼랑 끝에 매달린다

풍경은 세상 밖으로 문을 여는데 도망칠 문은 보이지 않아

혹시나, 눈 비비면 손금을 뒤집는 단풍의 실핏줄

아직은 살아 있구나 생채기 난 도토리처럼 미끄러지는 하산 길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멀어지는 산사의 풍경소리,

뒤돌아 발을 멈춘다 세상 밖으로 도망치는 일은 쉽지 않구나.

 

-시집 <가방을 찾습니다>에서

 

 


 

 

서동인 시인 / 벌레의 집

 

 

엉겅퀴를 캐서 신문지를 펼치고 다듬는다

 

산에서 따라온 작은 지네가 신문지를 기어 다닌다

놀란 마음에 화장지로 눌러 죽인다

봄나물 맛보려다 살생이라니!

 

진드기도 꾸물거려 엄지손가락으로 누른다

명줄이 긴 지 잘 죽지 않는다

 

이름 모르는 벌레도 기어 나온다

허리 잘린 개미 새끼도 꿈물거린다

살려고 마지막까지 몸부림친다

 

봄날에 예고도 없이 죽임을 당하다니!

 

엉겅퀴를 다듬고 접는 신문에

벌레처럼 쫓겨난 아현동 철거민들

특집 기사가 눈을 찌른다

 

계간 '시인시대' 2019년 겨울호

 

 


 

 

서동인 시인 / 소리도 수평선

 

 

교과서에만 밑줄 긋지 마라

살아보니 중요한 것은 교과서 밖에 있더라

내가 네 손을 꼭 잡듯이

수평선이 그은 밑줄이 그러하듯이

밑줄 친 시간들은 서로를 잡아당기더라

하늘과 바다가 밑줄을 긋듯이

아름다운 것들은

교과서 밖

수평선 아래 숨어서 살더라

 

 


 

 

서동인 시인 / 서포일기

 

 

산꿩이 운다

어미를 그리워하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애절한 곡조

산나물을 뜯으며 해초를 뜯으며

한나절을 보내고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면

제 안의 적막마저 숨을 멈추는

여기는 절해고도

유성이 흘러 내리는

노도의 밤은 깊어가고

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도성의 소식 몰고 오려나

달빛 불러와 시를 짓는 밤

어머니 얼굴만 차오르고

수사(修辭)는 없어라, 그리움으로 족하리

변방에 내몰린 마음

남해 금산도 울고 설흘산도

저멀리 돌산도 운다

 

 


 

 

서동인 시인 / 가방에 든 게 뭐요 동백이지라

― 서동인論

 

 

 시간 강사로 전국을 떠돌다 가방을 잃어버린 여수 사내가 있다 아니다 이 문장은 고쳐 써야 한다 잃어버린 가방을 찾으러 이 섬 저 섬 시간 강사로 떠도는 사내가 있다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가방에 든 게 무어길래 대관절 무엇이길래 십수 년 전국을 떠도는 거냐고 그가 씨익 웃었다 동백이지라 여수 동백이지라 세월이 흘러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가방을 찾은 듯했다 가방에는 동백이 가득했다 그가 건넨 동백주 몇 잔을 비웠을 때 박라연 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다 아이고 박 선생, 우리 동인이가 이제 바다의 귀를 잘라낼 소리까지 얻었으니 우리 동인이 동백꽃처럼 붉은 시집 좀 만들어주소 <동백주 몇 잔에 꽃이 피다니>가 세상에 나온 사연이다 붉은 달이 뜨면 여수에 가야겠다 여수에 가서 우리 동인이랑 근처 사는 수서도 불러서 셋이서 함께 동백처럼 붉어져야겠다

 

 


 

 

서동인 시인 / 침몰

 

 

 잠들기에는 좀 딱딱한 다리미판에 꽃무늬 티셔츠 한 장 드러눕는다

 

 다림질을 하려고 물을 뿌리자 오랜 감기를 앓았는지 낮동안 빨랫줄에 매달린 꽃들이 시들시들 마른기침을 한다 누군가의 등에 담쟁이처럼 확 뿌리내리고 싶지만 매 순간 버림받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제발, 세탁기로 돌려버린 구겨진 기억을 펴다오 서서히 시동을 켜고 파도를 가르는 외항선 한 척 주름진 셔츠 목덜미를 간질이자 흔들리는 뱃머리 거친 숨을 몰아쉬는 물살에 닳은 소매 끝으로 황홀하게 감전된 꽃잎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차라리 가라앉아도 좋아 무면허 항해사는 중얼거리고 곰팡이 습기 찬 방 안에서는 전원 플러그를 뽑아줘야지

 

 뒤집히는 배 위로 꽃물 스민 저녁노을 바다의 천장이 내려앉는다

 

 


 

 

서동인 시인 / 적막을 말하다

 

 

 갯모래로 지은 집 바람나지 말라고, 빨간색 양철 지붕 마디 굵은 동아줄을 옷고름처럼 질끈 동여맸지만 여름이면 주름진 치맛자락 자주 펄럭거렸다

 

 태풍에 억장이 무너져 내린 천장, 쥐똥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물먹은 벽지 갉아먹는 곰팡이꽃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뭍에서 유배되어 떠밀려 가는 집 외양간 늙은 암소처럼 살아온 날들 되새김질하는 노인은 파리똥 내려앉은 낡은 사진틀에 갇힌 송아지 몰고 다니던 자식들 이름 차례로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애기섬 앞바다 배 타러 간 큰아들 바닷물에 쓸려 보낸 뒤 산비탈 일궈온 허망한 세월 꼬깃꼬깃 가슴에 접어 뒀지만 가끔씩 연탄집게로 아궁이 두드리며 읊조리는 육자배기 한 가락 해거름 굴뚝 연기처럼 풀풀 휘감아 오르면 허물어지는 집 정지문*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 누구냐, 소리치면 이내 사라지는 미치도록 보고 싶은 저 환영(幻影), 갓김치 안주삼아 털어 마시는 쓴 소주 몇 모금 목젖을 타고 아득한 바다로 흘러 내렸다

 

 그해 가을 서까래 앙상한 그 집 마당에는 늦바람이 났는지 출렁이는 다도해 물살에 섬을 낳았다는 노인의 소문만 해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고 고추 잠자리떼, 바람난 빈집을 오래도록 맴돌았다

 

*부엌문의 남도 사투리

 

 


 

서동인 시인

전남 여수 출생.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학위 취득. 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난시> <갈무리> <창작노트>동인.  시집 <가방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