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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애정 시인 / 혀의 꽃
오늘 혀가 가출합니까 내일 혀가 출가합니까
가출과 출가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자유 갈망하는 손이 문을 열고 나갑니다
무료함 견디지 못한 말이 길 따라 무작정 걷습니다
혀가 사라져 심심한 입은 껌을 씹습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풍선껌 뻥 하고 터지면 사방에서 침이 들어옵니다
혀에 꽃이 피는 순간입니다
안애정 시인 / 꽃무릇 -지귀*의 사랑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을 때 그대 바람처럼 내 곁을 스쳐갔습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으리라 이대로 불꽃이 되어도 좋으리라
천 년을 기다리면 그대 볼 수 있을까요
그리움이 내 몸을 갈래갈래 찢어 하늘과 땅을 피로 붉게 적시면 그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사랑하다 사랑하다 억겁의 시간이 흘러 나 그대 앞에 마주 설수 없어도 여왕이여, 나의 사랑이여 내 영혼 꽃무릇이 되었습니다
※지귀 : 신라 선덕여왕을 사랑한 백성. 사랑의 열병을 앓다 불공을 마치고 돌아가던 여왕으로부터 정표로 금팔찌를 받은 후 기쁨에 겨워 제 몸이 타 올랐다는 전설 속의 사람.
안애정 시인 / 그대 지금은 -전주 덕진 연못에서
당신 마음이 천둥처럼 내게 왔습니다
후드득후드득 잠시 머물다 떠난 당신의 마음
여름 끝날 때까지 수없이 붉은 꽃봉오리 피워 연지蓮池에 가득 채웠습니다
당신 향한 그리움 방울방울 모아 다시 돌려 드립니다
그대, 지금은 누구 마음을 흔들고 계시나요
안애정 시인 / 풍경
바람이 만드는 소리를 듣기 위해 걸어놓은 풍경
추가 흔들릴 때마다 동백이 피고 목련이 흩어지는데 바람을 싫어하는 고양이 수리는 지붕 위로 올라가 해바라기하고
서쪽 바닷가에서 온 해당화는 뿌리 내리기 위해 앞산으로 넘어가는 꽃노을을 삼켰다
바람이 지나가고 풍경이 소리를 만들고 그때마다 돌 마당에 서 있는 무른 감나무 가지는 감을 매달았다
풍경이 풍경을 그리는 터득골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람이 넘겨주는 책을 읽었다
안애정 시인 / 노란 꽃비
선유동 게곡에 들어서니 세상이 온통 노랗다
사방으로 뻗친 뙤약볕에 맨몸 드러낸 채 야위어가는 바위 구름에 물든 채운사 가는 길 따라 모감주나무에 꽃이 피었다
니 오라비 무덤 떼 자리 잡아야 하는데 벌써 저리 꽃이 피었구나
염주알 굴리며 천수경을 독송하는 칠순 홀어머니가 비친 유리창에 노란 꽃비가 내린다
-시집 <구피를 닮은 여자>(시산맥)
안애정 시인 / 해운대 아침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파도 소리를 끌고 오고
흰 모래가 들어오는 푸른 파도를 안고
파도가 파도를 부르고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해운대
발길 멈추니 빛 내림으로 바다가 눈을 뜬다
바다가 윤슬에 반짝인다
안애정 시인 / 고래가 날았다
장생포에 배가 떴다
화살처럼 솟아오르는 고래를 보기 위해 바다 위를 달리는 사람들
춤추는 갈매기 떼 쫓아가면 새파란 파도가 줄달음치고 우르르 고래가 날아올랐다
사방으로 푸른 바닷살이 튀고 고래를 본 사람들은 바다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고래가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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