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회진 시인 /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7.
강회진 시인 /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강회진 시인 /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조선시대 시집간 딸은 명절이 오면

어머니와 반보기를 했다지

친정어머니가 반, 시집간 딸이 반

중간에서 짧은 만남 후

아쉬운 이별을 했다는 반보기

 

세상에서 이토록 간절한 말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내가 반을 가고 당신이 반을 오면

반이라도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너무 멀리 가거나 혹은

미처 이르지 못해

결국 만나지 못하고

당신과 나의 중간은 어디쯤인가

지도에도 없는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세상에서 이토록 슬픈 말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에서

 

 


 

 

강회진 시인 / 늙은 고향

 

 

어둔 숲 쪽에서 수리부엉이 울자

고라니 울음 풀쩍풀쩍 빈 마당 뛰어다닌다

배가 홀쭉한 길고양이들이 앙칼지게 울고

털 빠진 너구리들이 운다.

컹컹, 곤히 자고 있던 강아지 깨어 운다

소란스러운 밤

문 열고 마당에 나서니

눈 쌓인 앞산, 소나무들이 울고 있다

늙은 고향은 우는 것들 투성이

고향집 온도는 부모의 온도

점점 식어가는 고향의 온도

늙은 아비와 어미가 하루 종일 누워있는 방

반짝, 불 켜졌다 꺼진다

영원히 불 꺼진 방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강회진 시인 /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귀뚜라미 같기도 하고 여치 같기도 하고

초가을 밤 지리산 청령치쯤에서 들은

풀벌레 소리, 풀잎들 몸 비벼대는 푸른 소리

가끔 고향집 마당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

사립문 밖으로 사라지던 고라니의 뒷모습

 

무거운 돌을 덮고 가재처럼 모로 누우면

자꾸만 들리는 맑은 계곡 물 흐르는 소리

여름밤 보랏빛 도라지꽃 폭폭 터지는 소리

살얼음 속 보랏빛 노루귀 꽃대 오르는 소리

 

누가 내 귓속에 꽃을 심어 놓았나

늙은 엄마는 내가 홀로 늙어가는 증거라며

신세학원이구나, 봄비처럼 중얼거려요

 

이명은 밤마다 나를 낯선 지명으로 데려다 놓아요

낮은 수척하고 밤은 짙으니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요

 

귀를 길게 늘이고

나는 이제 봄으로 살기로 했어요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사

 

 


 

 

강회진 시인 / 야생부추

 

 

낮에는 구릉을 지나는 구름을 보았다

주인도 없이 양떼와 염소들이 구름을 뜯으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집주인 아들을 따라 찰랑찰랑 강물을 퍼 나르고

앞가슴에 말똥을 주워담았다.

살찐 구름들이 어둠을 품고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달 떠올랐다.

야생 허부와 야생부추의 알싸한 향기를 베고

뻥 뚫린 하늘 아래 누웠다.

무엇을 기다리는 지도 모르고

나는 이편에서 저편으로 흘러가는 별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초원을 가르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무슨 슬픈 예감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간 『시와정신』 2013, 봄호

 

 


 

 

강회진 시인 / 나는 겨울만이 아닙니다

 

 

겨울나무는 마른 가지 속에

아무도 모르게 푸르른 눈 품고 있다

수많은 잎사귀 품고 있다.

나무는 스스로를 지키려

스스로를 견디며

눈보라 치는 들판에

잠시,

빈 몸으로 서 있는 것이다

 

 


 

 

강회진 시인 / 지실마을

 

 

지실 마을 가

자미꽃 되고 싶다는 그리하여

마당 한 켠 길게 뿌리내리며 살고 싶다는

한 사람 보았다 오늘은

네 살박이 아이 앞세우고

목백일홍 같은 그녀, 햇살 짱짱한 돌담 아래

해바라기 나왔다

아이와 함께 살 오른 희망을 모으고 있다

서울서 이사온 지 꼭 일곱달째

넓은 마당이 낯설기만 해 때로는

모아둔 햇살들 금간 벽 틈으로

우울하게 빠져 나가기도 하지만

지난 겨울 폭설속에도

마당 한 켠 비닐하우스에선

상추며 쑥갓들 그렁그렁 자라고

가만 보면 햇살들

꽃망울 부푼 매화나무 타고 내려와

모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이제는 제법 자란 잔뿌리들을 다독이기도 하는 것을

햇살 받은 그녀의 옆모습이 환하다.

 

 


 

 

강회진 시인 / 불영사(佛影寺)보름밤

 

 

천축산 별들 낮이면

자두나무 석류나무 찾아와

짙푸른 잎사귀들 되고 물오른 열매들 되어

눈 푸른 사미승 염불소리 들으며 속으로 속으로 깊어 갑니다

대웅전 한켠 자주달개비 하르르 눈 뜰때면

연못 안 빛나는 사금파리 되어 흐릅니다

그 빛 너무 맑고 환해 천축한 부처님도 슬며시 내려오고

풍덩풍덩 응진전 나한님도 들어옵니다

꽉찬 보름달 내려다 보고는 힘껏 입김 불어봅니다

순간,

후원 뜨락 늦도록 잠들지 못하던 날선 독사 한 마리

다독여 잠재우던 달맞이꽃들 한꺼번에 후두둑 피어납니다

한 순간 이었습니다

웽그렁웽그렁

月波위로 오랫토록 풍경소리 흐릅니다

 

 


 

강회진 시인

1975년 충남 홍성 출생, 1997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2004년 《문학사상》신인상 수상, 시집 『일요일의 우편배달부』 『반하다, 홀딱』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포토에세이 『했으나 하지 않은 날들이 좋았다-몽골이 내게 준 말들』 등. 2020년 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