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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연 시인 / 사실과 진실
억울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전처럼 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건데 마음이 다칠까 봐 겁이 나서 잠깐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건데
침묵이 이렇게 오해만 낳을 줄 몰랐어
아파하는 내게 윤주는 사실과 진실이라는 단어를 보여줬다
사실은 있었던 일 겉으로 드러난 일 진실은 아무것도 덧씌워지지 않은 그대로의 마음
사람들이 진실을 안다면 널 오해할 수 없을 거야
나는 진실을 알아 너의 진심을 알아
사실과 진실 진실과 사실
한 글자 차이로 뒤틀리고 어긋나는 그런 복잡한 거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너무 깨끗해서 엉엉 울었다
정다연 시인 / 가정
소파는 크림색이 어때? 때가 덜 타는 검정이 나을까. 티브이는 몇 인치를 사는 것이 좋을까. 너와 나 단둘만 볼 거라면 가장 작은것이어도 좋지만
더 넓고 깨끗한 세계가 보고 싶어질 수 있으니까. 새털 같은 함박눈, 자글자글 잠수하는 은빛꼬리 물고기, 소금사막. 지금은 없는, 어쩌면 생길 수도 있는 아이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진 않을까. 선명하게
확신할 수있니. 너는 잠귀가 어두워서, 네가 잠잘 때 내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지. 나는 뒤척이니까. 서걱이는 이불, 스며드는 가습기 연기에도 잘 깨니까. 말한 적 있나. 윗집 사람은 새벽 두시만 되면 변기 물을 계속 내려. 그 소리가 끝도 없이 내 입속으로 빨려와 생각해본 적 있어? 머리 위에 있는 것이 터질 듯 부풀어오른 배수관이라는거. 폭식한 사람의 위처럼 쏟아질 것 같은데. 나는 있지, 가끔 네 숨소리도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어.
그러니까 아주 커다란 침대를 사자. 서로의 윤곽이 마음껏 흘러갈 수 있도록 빛이 새어들지 않는 암막 커튼을 치고 너와 나의 손으로 두꺼운 벽을 만들자. 새하얀 페인트칠, 다 덮어도 될까. 그래도 될까? 얼룩 한점 없는 벽지, 속을 파고드는 곰팡이, 명료하게 구분되는 네 옷과 내 옷. 한번도 헷갈린 적 없다.
집이 자랄 수 있을까. 너는 나의 배에서 한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는 너와 내가 낳은 아이여만 하고, 네 성을 가져야만하는데, 나는 자꾸 너의 어깨 너머로 열린 문을 보지. 내가 낳지도 않은 아이를 상상하고, 무수히 사라진 너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창 너머 창이 너무 많다.
셀 수 없는데, 내 손을 잡고 있는 건 너뿐이지. 식탁은 4인용이 좋겠어. 각방에는 각자가 좋아하는 그림을 걸자. 의자에 올라가 못을 박는데 도무지 벽에 심어지지 않는다. 탕, 탕, 균형을 잃었다가 회복한다.
그림이었다.
사람이 심은 건물이 건물을 뚫고 자라는,
벽이 줄어든다.
정다연 시인 / 홀
우산을 펼친다 넘치는 인파와 쓰레기, 아스팔트에 고인 빗물을 쪼는 비둘기떼 사이에서 퍼지는 하수구 냄새
상상한다 깨끗하게 삼켜질 이 도시를
비둘기 한마리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비둘기와 나는 사이좋게 병든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은 실례 같다 날개가 있었다면 나도 빗물에 씻겼을까 안전선이 둘러진다
불탄 잔해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 파고 부수고 파고 부수고 이미 다 부서졌는데, 무엇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걸까
나는 비껴간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거리로부터, 도시로부터 멀리 더 멀리 극도로 비껴가고 싶은데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가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사랑하면 어떨까요?
벽 앞에 선 소년을 티브이에서 보았다 광장에서 우산을 펼쳐 든 채 소년의 주위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거대하게 제 안을 불태우며 중력을 견디는 항성처럼
폭발한다
어떤 충돌은 반드시 우리에게 닿는다 십억년이 지나서도, 온 우주를 파장으로 뒤덮으며 안으로 무너진다 더 작게, 아주 작은 하나의 점으로 응축될 때까지 폭발을 멈추지 않는다
우산을 접는다
오늘은 비를 막았다 내일은 이것으로 무엇을 막을지 알 수 없다
기어코 소년의 등을 적시고야마는 빗방울
터지며 함께 삼켜지는
빛,
밖에서 보면 텅 빈 어둠일 것이다 그러나 안이라면
정다연 시인 / 옆자리
네가 올지 몰라 비 맞지 않도록 옆자리에 우산을 올려 두었어 기다리는데 날개 젖은 제비나비도 쉬었다 날아가고 민달팽이도 머물다 갔어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날아가지 않게 내가 꽉 잡고 있었어 혹시 네가 올지 몰라 화장실도 꾹 참고 기다렸어 언제 와? 비도 그치고 날도 개고 하루 종일 햇볕만 닿아서 내 옆자리 되게 따뜻한데 - 2024.03.12 cbs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정다연 시인 / 친애하는 나의 불안
‘기척도 없이 불안이 다가올 때
길을 지나다 우연히 아기 고양이와 만난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달래 주려고 했던 건데 매섭게 발톱으로 할퀴어도 깨진 빗금처럼 상처가 나도
다가오는 손길이 많이 무서웠구나 너도 내가 처음이지? 가까이는 말고 이렇게 같이 있자 한 걸음 물러 있게 돼’
-『문화일보 / 유희경의 시:선(詩:選)』 2024.01.31.
정다연 시인 / 전환 커트는 생각보다 비쌌다 한번에 세벌씩만 피팅 가능한 아울렛에 가서 옷을 골랐다 목 가에 주름이 잡힌 블라우스와 니트를 입었다가 벗으면서 열심히 옷을 갈아입었다 속옷 차림으로 나와 가장 어울리는 것을 가져보려고 푸드코트를 한바퀴 쭉 돌았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구별이 갔다 냄새만으로도 배가 불렀고 바닐라 맛 마카롱 향이 가장 좋았다 코너를 돌면 쇼핑몰이 이어졌다 팔리지 않는 옷들이 산더미였다 하나하나 입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이 들었던 게 왜 미안했을까 다리가 아파서 앉을 곳을 찾았다 서점 바닥에 앉은 것은이상해보이지 않았고 적당히 숨어 있는 느낌이 좋았다 안정의 초점이 맞지 않아 서가에 기대 조는 사람들이 하나처럼 흐릿해 보였다 조명이 눈부시게 하얬다 펼쳐 든 책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류사회에 속한 남자는 세계 곳곳에서 들여온 보석들로 가득 찬 부모의 집에 공포를 느꼈다 그는 두칸짜리 작은 집에서 평생을 독선으로 살다 죽었다 자른 머리칼이 눈가에 남아 따끔거렸다 새로 산 블라우스는 목이 꽉 껴서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했다 역시 세일 상품에는 이유가 있지 혼잣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덜미의 불편함을 받아들였다 생각 속에서 남자를 붙잡지 않았다 미안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이해도 원하지 않았고 서가에 비친 그림자와 언제나 하나였다
정다연 시인 / 나는 개와 함께공원으로 간다 “이 개의 견종이 뭐지요” 역시 개를 데려온 여자가 묻는다 “······믹스견입니다” "그래도 뭐랑 뭐랑 섞였는지는 알 거 아니에요 보더콜리, 파피용, 스피츠?" “······잘 모릅니다” “우리 개는 자연임신 되지 않고 유전자 변형으로만 임신 가능한 개예요. 아주 값이 비싸고 귀해요” “······그렇군요” * 개와 나는 그저 함께 걷는다 "이리 와 이리 와” 모르는 남자들이 손짓하고 뒤따라와 휘파람을 분다 만져보고 싶어 말한다 나와 개는 그냥 계속 갈 뿐인데 "개새끼네” 노란 승합차에서 내린 아이가 말한다 *
개와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아까부터 14층 남자는 세균에 감염될 것처럼 울상이고 “애나 낳지 왜 개를 키워?" 옆집 아주머니는 내게 묻는다. 나와 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뿐이다 *
나는 집으로 돌아와 개의 발을 닦여주고, 물과 사료를 따라준다 "개 키우는 거 보니까 애도 잘 키우겠네." 할머니는 말하고 "개를 키우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일은 관련이 없어요." 내가 말한다.
* 나는 개와 함께 공원으로 간다. 공장을 지나 오염된 강가를 지나 때로는 들판으로 때로는 낯선 동네로 개는 내가 혼자서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로 날 데려가고 나도 가끔 개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간다 산책은 늘 엇비슷하지만 개와 나는 같이 걷고 자란다 누군가는 혀를 굴리며 날 불러 세우고 누군가는 정말 개를 애처럼 생각하냐고 물을 것이지만 이 모든 말에 관심 없는 개는 땅의 냄새를 맡으며 그저 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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