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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민 시인 / 남태평양 재봉틀
평생 한번 올까말까 한 해변의 첫 정사, 그런 로맨스 딱! 당첨되었습니다 그가 내 몸속 돌려놓고 간 인생 역전 막간 하나
모래 바닥에 널브러진 내 삭신 욱신거리도록 땀구멍까지 뚫어대며 박음질해대는데 나는 헉, 호흡곤란, 마리화나 마신 것 만큼이나 좌우 숨통 뒤집어져라 웃어댔습니다 바늘 끝 묻은 독이 온몸 호고 감칠 때면
이 중독의 속도 고스란히 챙겨야지 죽더라도 집에 기어들어가서 비상 전원 버튼이라도 누르고 죽어야지 노트북에 저장해 둔 자궁 안에 아직 다 쓰지 못한 해파리의 촉수를 꾹꾹 되박음질해야지
그가 스친 독이 보기 드문 흉터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붉은 어깨띠 두르듯 내 앞가슴에 견고한 사선으로 대못처럼 얼기설기 박음질 돼 있습니다
지금도 제어장치 하나 없이 쭉 잘나가는 남태평양 재봉틀 또 누군가를 깁고 있는지
박영민 시인 / 관계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
당신은 점점 늙어 가는데 나는 점점 젊어집니다. 잔금 많은 당신의 안경 너머, 영하의 어둠 막 흩날리면 협탁 위 벗어 놓은 당신의 시력은 희미해지고, 마이너스 창밖으로 막 발목을 잘라 놓고 기어나간 나는, 당신의 달달한 눈알을 빼먹고 발 없어도 잘 굴러갑니다.
당신의 등골을 갈아 빚은 설경, 낮보다 밤이 환한 저 먼 꿈의 빙하기까지도 챙겨 갑니다. 두고온 내 발목을 끌어안고 잠든 당신의 렌즈 밖은 온통 정전. 불협화음의 음정들 철썩거리며 성에 낀 유리창에 겹겹 엉기는, 나라는 폭설은 통보되지 않는, 그러기에 기껏 흐느적거리는 젖은 종이조각을 음악이라 부를 필요 없습니다. 지워지며 덧씌워지는 위독한 나의 독백을 첫눈이라며 담배 태울 이유 없습니다. 그 흥얼거리는 상념을 굳이 운율로 설명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한 생애를 거둬갑니다. 당신 눈알을 파먹고 대설주의보 건너가는 나는 절뚝거리는 문장으로 고요히 쌓여가다가 격렬하게 지워지며, 비탈 뿐인 공중에 내 것 아닌 왈츠 찍어가며 랄랄라, 오간데 없이 흩어집니다.
*영화 ‘장화홍련’ 삽입곡
박영민 시인 / 아르곤, 질소, 가스란 가스를 다 싣고
폭발하기 위해 달리는 자살특공대처럼 목숨 걸었다 저, 질주하는 1톤 트럭
언제 어디서나 싸디싸게 신속배달 준비 다 되었지만 기억해? 등 뒤에서 혼자 밀반출 되던 모멸감 네 전부인 자본의 대형 틀 한번에 날려버릴 수십 개 가스통들을 내가 나마저 배신하는 나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너는 쉽게 제거할 수 없는 의심만 자꾸 점검하겠지만 빵을 구워주고 초스피드 광 타이어며 엘리베이터가 되어 너를 가동 시켜주는, 그런 애정으로 확인되길 얼마나 바랬던가 단 한번 불멸을 꿈꾸는 나는 정들 세상이 없어 수백 통 위험물로 취급한지 오래다
스피커 빵빵한 트롯트 유행가 튼 채 열 받은 가스통 싣고 이 땡볕 세상, 오늘도 신바람으로 달리는 중이다
박영민 시인 / 옷이 아름다운 것은
유행 타지 않기 때문이다 단벌인데 그녀가 입으면 늘 새 옷같이 폼 난다 맞춤 정장 같기도 하고 우아하기는 이브닝드레스 같기도 한 아니다, 오래될수록 더 편한 스판 청바지 같은 세탁도 다림질도 필요 없이 긴 꽁지 뒤태까지 늘 스타일리시한
패션의 절대지존, 까치는
박영민 시인 / 인적 없는 거리와 쌀밥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오돌오돌 돋아나는 인적없는거리회색빛 하늘그리운 고향 밥 맛 없는 기법
소복 차려 입고 다닥다닥 앉아있는 여자 떼 밥통 뚜껑 열고 가로등불빛 하나둘추억처럼 새록새록기억의 수평선 너머진주처 럼영롱하게 입 속으로 기어 들어와서 꾸물꾸물, 오늘에 이르기까지 권장하는 엄마표 순결, 너무 울궈먹은 칠흑같은어둠 떠난우리님 메아리되어 슬픔의 단비 맹숭거리네
그러기에 몰락과 불온을 1:1비율로, 그 위에 새로 뽑은 몇 가닥의 빨간 머리카락과, 아카시아 벌꿀, 불끈한 힘줄, 토마토 케찹 코믹하게 비벼 먹을래
날것인 낭만과 버리기 아까워 남겨둔 찌든 양념을 몽땅 낭비하다보면 환상은 자작나무 숲 회전문 통과하여 코카서스 절 벽
물만 먹고 나온 식당 밖, 인적없는거리회색빛 하늘그리운고향 나는 쌀밥과 알고 지낸 사이일 뿐 가로등불빛하나둘 추억처럼 새록새록기억의 수평 너머 진주처럼 영롱하게 보리와의 절절한 과거는 모른 척 관심 없을 뿐 칠흑같은 어둠떠난우리님 메아리되어 슬픔의 단비 친하고 싶은, 식상하지 않은 밥맛 상상하며
아, 아아 저녁 쫄쫄 굶는
박영민 시인 / 후라이꽃
달걀 익었습니다 개망초 피었습니다 아직 덜 핀 달걀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세요 백 퍼센트 순정 햇살방울로 몇 묶음 꽃봉오리 톡, 깨뜨려요 깊이 파인 오목가슴 후라이팬에 흰자가 노른자 테두리 두르며 둥글게 퍼져요
그래, 다 익은 것 보다 이 정도만 익어 그대 도시락 밥 위에 무릎 꿇어 바쳐지고 싶은 소신공양 밥알로 뭉클하게 묻어날 이제 막 반숙으로 피어났어요 풀다 만 내 노란 옷고름 열고
박영민 시인 / 밤 편지, 생각꽃 피고 또 피고
1 당신도 없는데 마셨습니다. 가르쳐준 맥주 맛도 이젠 제법 압니다. 한강대로를 음주운전으로 달리다가 여의도로 빠졌습니다. 너무 멀리 왔다고 설득마세요. 그 위태로운 일탈에 여기까지 살아냈으니까요. 당신으로 가득 찬 스피커폰은 자동으로 켜져요. 흘러나오는 음성만큼 당신은 참 따뜻해요. 웃어요. 화를 내요, 울어요, 멈췄다 떠나요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종이 뭉치를 쑤셔 넣고 입 틀어막은, 나는 볼품없이 완벽하게 무너져요. 펄펄 끓는 감성 하나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오리라, 그 정열만이 벚꽃나무처럼 세상을 뒤덮으리라, 후회 없는 생각이 쌓이는 밤이면 한없이 깨끗한 첫눈이 무조건 흩날리고 있습니다.
2 서늘한 가슴속 뭉클하게 내리꽂힌 통증은 왜 이리도 환하기만 한가 더는 이 세상 아닌 것처럼 시들어 가는 문장들도 마냥 순결하기만 한데 모두모두 벗어던져서 다시는 간절함이 아무리 간절해도 꾹꾹 눌러 적었다고 해도 빈칸 없는 생각꽃은 꿈 속에서 꾼 꿈 모든 게 다 꿈이었다고 이 중얼거림은 기록에 없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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