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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무현 시인 / 어머니의 물감
막둥이에게 젖을 빼앗긴 젊은 아버지가 헛기침으로 별만 더듬다가 잠들게 한 그런 화려한 시절도 있지 않으셨냐며 어머니 없는 가슴을 씻어드릴라치면 아서라 아서 수줍음을 가리는 손사래사이로 그림 몇 장, 마른 호박잎처럼 언제 바스라질지 모를 몸에 간직한 내 소년기 유년기 신생아기
어느 곳 어느 순간에든 어머니가 곁에 있는 나의 성장기모습은 어머니가 젊음을 짜내어 그린 것이다
아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어머니여 그러나 당신의 물감은 몇 만년이 지났어도 지워지지 않는 알타미라동굴에 칠해진 짐승의 피보다 진하다
원무현 시인 / 두루마리
꽃집 모서리 앉은뱅이간판 밑에 엎드려 두리번거리던 길은 달동네 층층계단을 하얗게 오른다 자갈치시장 좌판과 이십사시 당구장에서 나와 세탁소 앞을 지나는 두 쌍 발자국 사이는 멀어서 오가는 도둑괭이 발자국에 경계가 없다 발자국이 호떡집을 지나 과일 집에 이르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얽히고 설킨 발자국에 달빛이 고물거린다 한참을 그렇게 가던 발자국이 담배 집 모퉁이를 돌더니 열쇠 집 옆 계단 길 밑에서 나란히 멈춘다 두 쌍의 발자국이 코를 마주한다 한 쌍의 발자국이 깊숙이 찍힌 첫 번째 계단에서 다른 한 쌍의 발자국이 사라졌다
한 쌍의 발자국이 등에 업힌 그들의 귀가를 읽어 줄 누가 또 있는지 하늘은 그해겨울이 가기 전 다시 한번 눈길 하얗게 펼쳐놓았다
원무현 시인 / 코끼리거북의 산란기
끝이 없는 산고가 해변을 채우고 나면 두어 선택받은 생명만이 태양의 따듯한 혀가 등을 핥는 축복 온몸 넘치게 받으며 大海로 大海로 싸리꽃 같은 백사장을 밟으며 갈 때 바닷바람 한줌 등 짝에 실어보는 거 생의 시작과 끝이 한나절도 못 되는 거 그런 삶이 숙명인 줄 알아 유리조각 재생공장 같은 모랫벌 속에서 우우우 밀려오는 파도를 재우고 들려오지 않는 저녁 종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라져 가야만 하는 흔적들아 너희 쓸쓸한 최후를 위해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생존법칙이 새겨진 눈물뿐이구나
아 지금은 몇몇의 영광에게 보낼 박수를 멈추고 등골에 저며오는 저 아픔들과 함께 하기 위해 더 깊은 고통의 바다로 가야만 하는, 산란의 때.
묻지 마라 산다는 게 한 편의 연극이라는 둥 일장의 춘몽이라는 둥 가볍게도 떠벌리며 노을 속으로 뛰어드는 낙엽이여 묻지 마시라 이 차가운 겨울에도 지구가 스스로 돌아가는 힘을 잠시도 풀지 않고 고단해야만 하는 이유를
원무현 시인 / 산복도로
멈추지 않고 가다보면 하늘 문 앞일 것 같은 산복도로에 꽃핍니다 자갈치시장서 노점 하는 정순네 할머니 지난 겨울 빙판 길에도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오르내렸다고 어미 아비 여윈 일곱 살이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초경 치른 손녀를 보노라면 저것이 시집가는 거 보고 눈감을 수 있을라나 하루하루 안타까운 게 세월이라 늦은 밤길 소쿠리 가득 이고 가는 보름달이 자고 난 사이 남은 생이 슥둑 잘려나간 초승달을 인 듯 무겁지만 정순아 내 새끼야 아직은 거뜬하다고 산복도로 담벼락 구석구석 개나리 진달래 핍니다 십구공탄 구멍구멍 고인 어둠 뚫으며 피는 불꽃처럼.
원무현 시인 / 水深만이 물의 깊이가 아니다
先史人의 흔적이 또렷이 각인되는 반구대암각화를 지나면 한실마을 수몰지구다. 일몰을 눈동자에 담으며 적요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검둥개처럼 곳곳에 웅크린 돌담의 흔적에 엎드려 맡는 물 냄새는 깊다. 담수한계선을 넘은 오랜 가뭄에 밀밭은 불타고 댐의 수심은 지금 바닥이다. 탁한 에메랄드빛 수면을 손날을 세워 밀면 검은 바닥이 드러난다. 이미 물이 완전히 말라 갈라진 뒤꿈치를 드러내는 근처바닥에는 깨진 옹기조각이 꽂혀있고 부러진 안테나가 감람나무가지처럼 반짝인다. 삶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얕은 물의 깊이, 나는 물의 깊이를 수심으로만 측정해왔었다. 능선을 넘어온 바람이 낮게 깔리어 수면에 일으키는 잔잔한 물결이 눈부신 것은, 미나리를 깔아놓고 언양 버스터미날 후미진 구석을 이 땅의 지층으로 올려놓는, 노파의 골 깊은 주름에 반짝이는 땀방울을, 먼 여로에 꺼지지 않는 한 점 불빛으로 남기기 위해 이미 쓰여진 문장을 지우고 지울 때, 백지 위를 물결처럼 밀려나가는 지우개의 흔적을 닮은 까닭이다.
깊이 일만 길 먼바다의 水深만이 물의 깊이가 아니다.
원무현 시인 / 산행기
때로는 시원한 때로는 절실한 울음을 쏟아내던 매미가 아이들에게 채집되고 있었다 울음으로 서까래 삼고 눈물로 등을 달았던 지난날 내 詩 또한, 표본 될 저 울음주머니처럼 간직할 가치가 있는가 묻고 물으며 산을 오를 때 앞을 가로막는 것은 절벽도 무엇도 아니었다 한 잔의 술도 한 숟갈의 밥도 아니었던 행간들, 나는 산 중턱에서 오름을 접고 철 늦은 울음을 울어야만 했다
원무현 시인 / 검은 꽃 피는 나무
우물물 퍼 어머니 여름밤 무더위를 씻어드립니다 손등과 어깨선 가득 엎드려있던 꽃이 달빛 아래 까맣게 피어납니다
이승에서 저승의 꽃을 피운 나무가 칠십 년 세월 구석구석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의 악력握力을 말합니다 “얘야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꽃을 피워낼 게다 논밭을 일구며 무꽃 배추꽃 다섯 마지기 가득 벼꽃도 피워 봤지만 내 몸에 피는 이 검은 꽃만큼 곱지는 않단! 다 네 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에 시들지 않을 꽃은 오직 이 꽃뿐이란다“
나무여, 당신 가지에 열리던 눈물과 웃음을 따먹은 자리마다 핀 것이 저승꽃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마는 야윈 어깨에 떨어지는 눈물, 이승을 밝히는 불꽃은 뜨겁고도 뜨거워 이 검은 꽃, 한 송이라도 태웠으면 좋으련만 여름밤 무더위가 우물을 다 비워도 식지 않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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