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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호 시인 / 거울 앞에서
잠시 거울을 바라 보다 미로 속을 헤매는 듯 안개꽃을 보았다.
히끗 히끗 흰머리가 잔설처럼 마주보고 웃는다.
눈가의 잔주름에 돌꽃 서리품어 이슬되어 흐른다.
언뜻 고개 들어 선뜻 바라보니 왠지 낯설지 않다.
아~~ 아버님
보고싶은 아버님
정선호 시인 / 3류 시인
시집 한 권 없는 족보 없는 3류 시인은 백사장에 시를 쓴다 볼까 부끄러워 쉽게 쓸고 가도록 파도 앞에 조그맣고 희미하게 흔들리며 쓴다
모래밭 원고지 지우개 파도 사유의 붉은 바다 나의 시집이다
맙소사
죽은 詩漁들이 꼬물꼬물 되살아나 밥상 위에 앉아 詩語들을 토악질하고 있다
정선호 시인 / 저수지 방죽을 달리는 사람
한여름 정오 무렵, 중년의 한 남자가 저수지 방죽을 따라 달렸다 저수지 안 물풀들과 새들, 곤충들도 그를 따라 헤엄치거나 달렸다 저수지 안 연꽃들은 거친 숨소리와 땀내를 받아 제 향기에 보태 더 진한 향을 냈다
남자는 연꽃 향기 가득 안고 저수지 속 길을 따라 달리며 수많은 전생의 자신을 만났다 몇 년 전 자식에게 철새를 보여주던 현생과 수백 년 전 저수지에서 물고기 잡고 수만 년 전 논과 밭 일구고 철새들 잡던 전생을
그 길 따라 달리는 건 극락으로 가는 일이며 태양을 몸 안에 품고 사는 것이다 시시포스처럼 땀 흘리며 인내를 시험하고 신을 찾아가는 고행의 길이다
저수지 안 연밭에는 불경 외는 소리 흐르고 저수지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 울어댔다 남자는 달리며 때때로 탄성을 지르거나 전생의 이웃들에게 인사도 건네며 달렸다
-시집 「바람을 낳는 철새들 (2021. 12. 삶창시선) 중에서
정선호 시인 / 올랑가포*운동장 트랙을 달리다
저녁의 운동장에 희미한 전등 몇 개 켜져 있다 지구는 자전하고 난 그 반대로 트랙 위를 달렸다 지구의 회전과 내 회전의 팽팽한 힘은 우주의 모든 힘을 유지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운동장엔 두 힘이 창조자의 묵인 하에 널려 있다 그 묵인으로 피부가 하얀 서양인과 황색인 동양인, 까만 사람들과 그 혼혈인이 섞여 트랙 위를 달렸다 서양인 노인과 그 부인인 검은 피부의 중년 여자와 혼혈의 그들 두 아이도 트랙을 달렸다 가족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운동장 전등에 매달고 가장 편하게 지구자전의 반대로 달렸다 자기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한 황색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 흘리며 달렸다 사랑을 잊은 사람들은 올랑가포 운동장에 가 봐야 한다 피부색 다른 가족은 어떻게 창조자에게 용서 구하는지 운동화 한 켤레 구해 그곳에 가 전등에 걸린 사랑의 빛이 얼마나 밝은지 보아야 한다 운동을 끝낸 가족은 더 커진 사랑을 전등에서 되찾아갔다
*올랑가포 : 필리핀 잠발레스주에 있는 도시
정선호 시인 / 경청
자신만만하고 정의로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릴때부터 농구선수로 자라 실업팀에서 운동을 했던 사랑스러운 친구 여동생입니다.
서로가 살아가기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뜸 했던 동생를 만났습니다.
치킨과 생맥주를 앞에두고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한참동안 들었습니다. 아픔이 겹겹히 싸여 굳어진 사연들 하나 둘 희석되는듯 즐거워 보였습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생백주와 그녀의 얘기가 소나기처럼 더위와 함께 씻겨 내려갑니다.
생맥주 잔에 비친 모습이 너무나 맑고 곱게 영글어져 있었습니다.
정선호 시인 /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보고픈 친구야! 모두가 잠든밤 적막한 공간 속에 나홀로 식탁에 앉아서 소주를 친구 삼아 쓸쓸하게 잔을 비우고 있다네 자네가 곁에 있다면 즐거운 자리가 되겠건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지난 날을 그려본다네 뒤돌아 짚어보니 인생사 모험이 아닌것이 없더라고 자네와 같이 가시밭길 헤쳐가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머리에 가슴속에 남아 천근만근 짖누르고 있다네 이젠 잊어야겠지 하면서도 뒤돌아 보게되는것이 낙오자의 돌아 오지않는 쓰디쓴 메아리 이던가 정글 같은 인생살이 깊은 한숨소리만 저미어온다네 친구야 성환아 !!! 귀동아 조금만 참고 살아보자 다시 만나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한번더 호탕하게 웃어나보게 꿈속에서나마 한방울 하자 푹 잘주무시게나 사랑하고 사랑하는 보고픈 친구야
정선호 시인 / 그리움
시간여행을 떠났습니다
먼길가신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눈물지며 죄송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내 손을 잡아주시며 왜 이렇게 늙었냐고
눈물을 딱아주시는 손길이 떨렸습니다
또 다시 불효를 한것같아 엎드려 펑펑 웁니다.
정선호 시인 / 죽은 미술가의 그림을 경매하다
죽은 유명 미술가들의 그림이 미술관 전시실에 걸렸다 죽은 미술가는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고 전시실에 와서 손님을 맞고 그림을 사려는 사람과 흥정 했다 이승에 좋은 작품을 남겼던 미술가의 작품들이 인기가 여전히 좋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미술가는 죽어서도 돈 벌어 저승으로 가져갔다 저승 왕실의 재정은 죽은 미술가처럼 그림을 경매하거나 죽은 작가의 문학관 입장료와 묘지의 입장료, 죽어서도 계속 팔리는 책의 인세로 충당하였다
죽어서도 저승에서 돈을 버는 미술가와 작가들은 옥황상제의 배려로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저승에서도 미술가들은 그림 전시회를 열거나 시인과 작가는 책을 발간하거나 시화전을 열었다 이승에서 배가 고팠던 시인들은 배고프지 않고 마음껏 쓰고 싶은 시를 썼다
그대, 미술관의 경매에 있는 날엔 그곳에 가 보라 수많이 죽은 화가들이 그림 경매를 핑계로 이승에 소풍을 와 저승엔 없는 밥과 술 먹고 나중에는 퍼질러 앉아 노래도 부르다가 경매가 끝나면 돈 가방을 들고 유유히 사라짐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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