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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상학 시인 / 국화에게 미안하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9.
안상학 시인 / 국화에게 미안하다

안상학 시인 / 국화에게 미안하다

 

 

어쩌다 침을 뱉다가

국화꽃에게 그만

 

미안하고 미안해서

닦아주고 한참을 쓰다듬다가 그만

 

그동안

죄 없이 내 침을 뒤집어 쓴

개똥, 말똥, 소똥에게 미안해서 그만

 

국화꽃에게서 닦아낸 침을

내 가슴에도 묻혀 보았더니 그만

 

국화 향기가

국화 향기가 그만

 

 


 

 

안상학 시인 / 불영사

 

 

새가 날아오른다

그림자는 땅에 두고 간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부처는

그림자를 연못에 두고

산등을 타고 올라가 바위가 되었다

 

대웅보전 앞

삼층석탑은

원래 그림자를 갖지 않았다

 

초파일 무렵

아홉 번째 용을 타고 들어간 선묘는

여승의 그림자로 남았다

 

산신당앞 할미꽃은

제 그림자를 물고

오체투지 삼매에 들었다

 

몸을 땅에 묻은 돌거북은

그림자의 집착을 벗은 대신

절을 등에 지는 고행을 얻었다

 

새는 하늘에 있었고

그림자는 땅에 있었다

새는 새였고 그림자는 그림자였다

 

 


 

 

안상학 시인 / 겨울 물은 그렇게 흘러가는 중

 

 

겨우내 물은 죽으면서 천천히 흘러가는 중

겨우내 땅속 깊이 스스로를 저장하지 못한

잉여의 물들이 제대로 죽어가는 시간

 

눈보라는 동천 여항을 떠돌던 물들의 시신

스스로 눈꽃 조화를 품은 조문 행렬

저장된 물들의 허묘에 상복을 입히는 시간

 

푹포는 투신하면서 동사한 물의 상장(喪杖)

언 강은 강철로 괸 무지개*로 짠 관짝

만년설은 영면한 물로 기운 두 건

 

겨울 물은 그렇게 죽어서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중

(도무지 사람 말고는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때가 되면 봄은

반드시 그 죽은 물을 써서 꽃의 형상을 지을 것이다

 

*이육사의 시 <絶頂>에서 얻음

 

 


 

 

안상학 시인 / 설중매雪中梅

 

 

 지금 여기서 내가

 눈 속에서 꽃을 피우든지 꽃으로 피어서 눈을 맞든지

 

 나는 꽃으로 향기로울 때

 잎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잎으로 푸르를 때

 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금빛 열매를 달았을 때

 향기가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목으로 동토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꽃이었고 향기였고 잎이었고 열매였고 나목이었고 또 나는 꽃이었다가 향기였다가 잎이었다가 열매였다가 나목이었다가 또 나는 꽃이었으니

 

 나는 지금 내게 없는 기쁨을 노래한 적 없다

 나는 지금 내게 없는 슬픔을 노래한 적 없다

 

 나목이 나목을 잃고 꽃이 꽃을 잃고 열매가 열매를 잃고 잎이 잎을 잃고 향기가 향기를 잃을 때에도

 

 꽃에 앞서 잎을 내세운 적 없다 잎에 앞서 열매를 열매에 앞서 나목을 나목에 앞서 꽃을 꽃에 앞서 향기를 내세운 적 없다

 

 내가 눈 속에서 향기를 피우든지 향기로 피어 눈을 맞든지

 

 나는 다만 수많은 하나의 지금

 무수한 하나의 여기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을 뿐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23년 여름호 발표

 

 


 

 

안상학 시인 / 아버지의 수레바퀴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점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아들 딸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퀴를 찾을 무렵

아버지의 바퀴는 오토바이 두 대째로 굴렀다.

아들 딸들이 자동차 바퀴에 인생을 실었을 무렵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끝났다.

뺑소니 자동차 바퀴가 오토바이 바퀴를 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마지막 바퀴는 병원으로 실려가는 그때의 택시바퀴였다.

석 달 긴 끝에 깨어난 뒤

바퀴 잃은 아버지의 인생은 지팡이였다.

걸음 앞에 꾹꾹 점을 찍는 아버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하나 남은 바퀴는 죽어서 저기 갈 때,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의 노동은

오토바이 바퀴가 찌그러지면서 끝이 났다

 

 


 

 

안상학 시인 / 새들마을 이씨 가로되

 

 

 어느 해던가. 재릿재 너머 정노인, 당근 금이 좋다고 당근 심었지. 알콩달콩 키워서 처자 알종아리 같은 놈들을 그 얼마나 캤던고 웬 걸, 그 놈의 당근 값이 똥값이 되어 차띠기 장삿꾼도 포기하고 말았지. 그런다고 그 걸 내다버릴 양반 아니지, 암만. 곡기 끊고 주야장창, 때마다 당근만 깎아 먹었다지. 그 독한 양반, 겨우내 당근 하나로 버텼으니, 참. 그래도 봄이 오니 다시 삽날 팍팍 꽂는데 웬 힘이 그리 있던지, 눈빛은 또 어떻고, 아마도 이 소문이 나면, 몸에 좋은 거라면 못 먹는 게 없다는 양반들, 그때서야 바리바리 돈 싸들고 당근 찾아 전국을 헤맬지도 모르지. 근데 낭패야. 정노인, 제발 마늘농사만은 짓지 말아야 될 텐데, 아니라도 더운 여름 한 철 마늘만 먹겠다면, 나, 참, 환장할 일 아닌가. 안 그런가

 

 


 

안상학 시인

1962년 경북 안동시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1987年 11月의 新川' 당선.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2015.10. 제15회 고산문학대상 시 부문 수상. 2021년 제23회 백석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