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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용선 시인 / 마음의 행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8.
유용선 시인 / 마음의 행로

유용선 시인 / 마음의 행로

 

 

누구는 저기에서

굶주릴까 허리 동이는데

누구는 밤낮

좀더 맛난 것을

 

누구는 저기에서

목이 말라 물을 찾는데

누구는 밤낮

좀더 달콤한 것을

 

누구는 저기에서

억울하게 걷어 차이는데

누구는 밤낮

갈아 입을 예쁜 옷을

 

누구는 저기에서

넋을 잃고 곡을 하는데

 

누구는 밤낮

싱거운 우스개 소리를

누구는 저기에서

아픈 몸에 신음하는데

누구는 밤낮

몸에 편하다는 차이름을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마음은 어디로 가야하나?

 

 


 

 

유용선 시인 / 그림자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서

되고 싶지 않은 내가 되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며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고

앉고 싶지 않은 곳에 앉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나면,

 

먼지와 먼지 사이로

나는 사라지고

땅 위에 낯익은 그리움 하나 기-ㄹ-다.

 

 


 

 

유용선 시인 / 단상(斷想): 절망에 대하여

 

 

 인간이 하는 절망의 대부분은 불행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굶주리고 헐벗게 되거나 아프거나 죽음이 얼마 남지 않게 되거나 사랑을 되찾을 가망이 없게 된 뒤에야 지난 날 자신이 했던 숱한 절망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웠지 깨닫는다. 세상아, 너는 나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냐? 내가 그렇게 함부로 절망할 거라 생각하다니!

 

 


 

 

유용선 시인 / 어린왕자

 

 

온갖 빛깔 고운 찬사들이

제 의미를 잃고

소박한 탄성만이 잘 어울리는

그를 만난 그날

 

모자로밖에 보이지 않던

종이구렁이 속에 코끼리 있음을 본 후로 나는

원숭이를 닮은 사람 사람 속마다

자그만 우주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기름진 땅 위에 다툼이 일고

황량한 사막이 차라리 평화로울 때

사막을 방문한 어린왕자

"친구를 찾아요!"

 

불행하다

어린이를 잃은 어른들

“양이 장미를 먹어요!!"

그가 겁에 질리어 소리칠 때에

웃고들 있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도 그럴밖에

소 돼지가 사람을 먹고

눈 먼 발길질에 청춘이 절룩거려도

나 몰라라 하는 이들

 

왕들은 모태에서 대관식을 한 듯

혼자 잘난 체하고

부자는

하늘의 재물을 따 모은 양

땅에 인색하고

대열을 벗어난 낙오자들은

삶이 나누어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술로 환상으로 숨으려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바보짓을 도리어 자랑하거나

고운 일을 곱다 여길 줄 모르며

헛되이 뜬 구름 시간을 흘린다

 

외로운 여인, 나의 아름다운 왕자,

황혼아 너 다시금

하루 마흔 번 널 찾는 그를 보거들랑

잊지 말고 내게 알리라,

바람아, 너 날다가 혹시

그의 집 앞을 지나게 되거들랑

잊지 말고 내 그리움을 전해라.

잠들어 있거든 깨우지는 말고

 

사막에서 속삭이던 그의 작은 음성은

들로 산으로 문명으로 울리어

내 작은 우주에도 혼돈상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다다랐다.

“별들이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샘이 숨어있기 때문이죠."

 

이제 인간의 대지 위에

밤이 깊고

무심히 땅을 내려다 보는 별들은

슬기처럼 밝고

꽃인 양 어여쁜데

 

왕자,

비록 그 사막에 더 이상 너 없어도

언제나 너의 기억은

바랠 수 없는 순수로

너를 아는 모든 이와 함께

 

내 곁에 있다

내 안에 있다

 

 


 

 

유용선 시인 / 한 그루 고목(古木)에게 물었네

- 유일한 스승 구상 시인께

 

 

새파랗게 젊은 시인이 한 그루 고목에게 물었네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그런 마음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요, 삶이란

그렇듯 예견할 수 없는 것. 나는 두려워요.

진실의 자리에 허구가 들어앉는 날, 만약에

그런 날이 내게 닥친다면? 빛 바랜 꿈으로

허튼 노래나 부르는 내가 되고 싶진 않아요."

 

숱한 계절을 겪은 고목이 대답했네

 

"맨 처음 바람에 내 모든 잎사귀를 빼앗기던

그 날에 나는 두려워 떨며 울었소, 운명이란

그렇듯 가혹한 것. 나는 절망하며 탄식했어요.

앙상한 가지에 새들도 보이지 않던 그 나날에

다른 무슨 생각이 들었겠어요? 다만 눈물로

닥쳐올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요……."

 

말을 잊은 채 듣고 있는 시인에게

고목은 살며시 웃음 지으며 이야기했네

 

"견디고 기다리는 나날의 끝에

다시금 태양은 가까이 다가오고

움츠렸던 온 몸 곳곳에 물기 솟아

연두빛깔 잎사귀 마침내 부활하던

그 날, 비로소 나는 깨달았지요,

내 삶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말 없이 듣고 있는 시인에게

고목은 너그러이 웃음 지으며 이야기했네

 

"다만 한 평생 시를 쓰고자 할 때

진실의 자리에 허구를 앉히지 않으며

다만 견디며 기다리는 사람이라야

시련의 나날에 마음 잃지 않으리니,

젊은이여, 그대에게 줄 말은 이 뿐.

귀담아 듣고 안 듣고는 그대의 몫.

 

 


 

 

유용선 시인 / 혀

 

 

보검은 둔한 칼집 속에 머무네, 빛을 감춘 채

 

-시집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책나무 시창≫에서

 

 


 

 

유용선 시인 / 허수아비

 

 

놀림 받는 텅빈 머리로도 번뇌는 깊어

눈도 입도 눈물도 없이 울 줄 아는 이,

누더기를 걸치고도 당당히 두 팔 벌려

애비에미 아들 딸 아내를 지켜내는 이,

그의 꿈과 외침이 매양 허탕을 친대도

그는 한 밤을 준비해 아침해를 맞는다.

그는 밤마다 별의 노래를 듣는다. 들,

어두운 빈 들에 장님같은 바람이 불면,

갈 데 없는 갈대, 그의 몸도 흔들린다.

아서라, 거기 들녘의 어린 것들아. 돌,

그를 겨누어 던지지 마라, 죄 받을라.

 

 


 

 

유용선 시인 / 어느 고운 얼굴 함께

 

 

자그맣고 아담한 집처럼 생긴

낡고 느릿느릿한 나룻배 위에서

 

철새처럼 자유롭던

어리석은 마음 안에서

 

내 가장 꽃다운 나이에

사나운 폭풍우 나를 붙잡았네

풍랑은 오래 머물러

그만 자유를 잃고 말았지

 

고달픈 항해 도중에

어느 고운 얼굴 함께

 

 


 

유용선 시인

1967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졸업. 대학 재학중인 1992, 1993년 두 권의 시집 상재. 이후 문예교육 및 독서지도 연구에 전념. 2004년 문단활동 재개. 2006년 제1회 <시와창작 문학상 > 수상. 2006년 시집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시창기획시선. 1993년 시집 『잊는 연습 걷는 연습』, 독서학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