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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 /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 가본게 언제인가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을 것이다 크기에 빗댄다면 대합탕 옆에 놓인 소주잔과 같을 것이다 방점처럼, 사랑하는 이 옆에서 그이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마음처럼 참이슬은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는 들큼한 취객의 등이여, 당신도 오래 견딘 것인가 소주병의 푸른빛이 비상구로 보이는가 옆을 힐끗거리며 나는 일편단심 오리지널이야, 프레쉬라니, 저렇게 푸르다니, 풋, 이러면서 그리움에도 등급을 매기는 나라가 저 새벽의 천변에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끝내 가지 않을 혼자라서 끝내 갈 수 없는 나라가 저 피안에서 취객의 등처럼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2013)
권혁웅 시인 / 월하의 공동묘지
등이 가려울 때면 누군가 내 안에서, 나를 등지고 나가겠다고 긁어대는 것 같다
베란다에 두고 키우던 강아지가 나를 볼 때마다 뒷발로 서서 유리문을 두드리듯이
고골을 묻은 지 15년 만에 개묘했더니 관에서 발버둥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부활하면 뭐 해? 다시 관속인데,
불사가 되겠다고 진시황은 수은을 원샷하고 그 결과 급사했다
자기가 무슨 실버 서퍼도 아니고 옛날식 온도계도 아니고
칠성판에 눕는다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두툼하게 썬 광어회를 손으로 집을 때 그런 느낌입니까?
아니면 운동화 신고 빗길 걸을 때 발가락으로 스며드는 빗물…… 같은 겁니까?
죽은 이들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내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영화 〈월하(月下)의 공동묘지〉
독립운동가의 딸 명순은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오빠 춘식과 애인 한수의 옥바라지를 위해 기생이 되고, 춘식은 동생을 위해 죄를 뒤집어써서 한수를 풀어준다 감옥에서 나온 한수는 명순을 아내로 맞고 만주를 오가며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되었으나 집안의 하녀 난주의 유혹에 놀아나 조강지처를 버린다 난주는 의사를 시켜 명순의 음식에 독을 타고, 원통하게 자살한 명순은 귀신이 되어 한수의 집을 찾아오는데……
근데 독립운동은 뭐하러 했지? 자살할 건데 독은 왜 탔지?
문이 열렸다고 한기 새나간다고 아까부터 LG 디오스 냉장고가 삑삑거리며 야단이다
권혁웅 시인 / 필멸의 고릴라
팔작지붕 위에서 이데아를 기다렸죠 도움닫기 하는 자세로 버림을 받았죠 지붕이 날아 갈까봐 거기 앉았던 건 아니에요
세탁기는 수평을 잡으려고 저렇게 탈탈거리나요? 허우적대는 아이처럼 수면에 한 번 올라오려고 물을 뱉나요?
베란다는 뛰어내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거기에 둔 게 갑자기 남편이 들어와서만은 아니에요
냉장고가 토라진 바위라면 거기서 달걀을 꺼낼 수는 없겠죠 가슴을 두드린다고 고릴라는 아니지만, 그렇게 안 한다고
고릴라가 제 자신이 아닌 것은 아니죠 고릴라와 우리의 거리는 오랑우탄과 고릴라의 거리와 같다고 합니다 오랑우탄이불멸이라면
저 얼굴 까만 짐승은 더더욱 흙빛이 되어 덜덜 떨겠죠, 생명보험에 들지 않으면 자식들이 걱정이고 들어두면 아내가 무서워서,
가만 보면 우두커니* 가운데는 꼭 원숭이가 있어요
이마가 반질반질한 스님 한 분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따르는 왁자지껄한 무리들은 모두 벼랑 끝을 향해 걸어갑니다
* 우두커니란 본래 한옥지붕 위에 한 줄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조각상들을 일컫는다. 잡상이라고 하며, 앞에서부터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라 불린다.
권혁웅 시인 / 장동건
1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장동건 고소영 커플과 같은 스튜디오에서 결혼사진을 찍었다 그건 장동건과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장동건과 같은 각도로 신부를 올려다보았다는 뜻 물론 만족스러운 높이를 위해 발밑에 쿠션이 필요했다 보라, 나는 장동건보다 더 많은 소품을 썼다 장동건은 장동건 만했지만 나는 나보다 컸다
신부 들러리가 자꾸 웃었습니다 내 마음은 세빛둥둥섬처럼 어리둥절했습니다
2 나중에 창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들 현빈만 보았지만 현빈은 현빈이니까 멋있는 거지 장동건은 좀비가 되어서도 멋있네 이럴 때를 위해 꼭 한 번 이 말을 쓰고 싶었다
개멋있네
3 비밀 하나 더 알려줄까 친구에서 장동건이 칼빵 맞기 전에 유오성에게 날린 유명한 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 그 말을 듣고 하와이에 다녀왔다 보라, 장동건은 하와이에 못 갔지만 나는 갔다
하와이에서 화장실에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가 잃어버렸다 1분도 안 지나서 되돌아갔는데 없어졌다 누가 집어갔다, 똥도 안 누고 그래서 장동건에게 전화를 못했다
몇 년 후에 하와이가 분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 거울을 보며 내가 니 시다바리가? 이 말을 몇 번이고 연습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내가 니 시다……
그래 이것이 장동건에 관한 내 시다
아무리 흔들어도 장동건은 돌아보지 않고 대신 유오성이 대답했습니다 죽고 싶나? 마음이 용각산처럼 조용해졌습니다
권혁웅 시인 / 고려 삼계탕 집에서
네이키드 치킨이야, 올 누드야 부끄러워서 머리를 숨겼어 죽지 아래 묻었는데 깃털을 뜯다 함께 버렸나봐 너무 추워서 소름이 돋았어 벗은 등을 타고 뜨거운 물이 흘렀지만 고려장이야. 병아리 떼 뿅뿅뿅 따라다니던 시절은 잊었어 40일 숙성 코스를 끝내고 굽은 등을 하고 산삼 캐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어 불은 찹쌀을 잔뜩 먹은 네이키드 치킨이야,엎드린 누드야 삼복이니 두 번 더 넘어져야 해 부끄러워서 두 다리를 꼬았어 그래도 丹心이야 타는 마음이야 달걀 대신 대추를 품었어 그래서 그대가 이열치열이라면 계륵이 되어도 좋아 계륵으로 남아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도 좋아 그대 입이 닿는다면 후꾼, 달아오른다면
권혁웅 시인 / 파문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에서
권혁웅 시인 /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 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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