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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종훈 시인 / 배달의 민족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8.
한종훈 시인 / 배달의 민족

한종훈 시인 / 배달의 민족

 

 

형은 폭염을 가로지르며 바퀴를 굴렸다

 

아, 죄송합니다

음료를 쏟았습니다

 

방지턱을 넘을 때

쏟아지는 얼음 소리가

철렁,

형의 마음도 흘러내렸을 것이다

 

고개 숙이며 헬멧을 벗자

땀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쏟은 음료 대신

커피 한 잔을 더 만들었다

형이 계산한다는 쪽지와 함께

 

그리고

 

지역 신문에 실린

음주 차량에 치어 사망한

이름 석 자

 

여전히

길 어딘가에서

형은 바퀴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시집 『가난은 유통기한이 없다』에서

 

 


 

 

한종훈 시인 / 닮은 것들

 

 

뾰족한 연필 부드러워지고

 

딱딱한 비누 매끈해지고

 

뻑뻑한 신발 편해지고

 

떳떳한 책 보드레지고

 

우리 엄마 무릎

 

삐걱거리고

 

 


 

 

한종훈 시인 / 내 집 마련

 

 

하얗게 파마한 벚나무에

낯선 새가

갈색 둥지로 머리핀을 끼워 넣었다

 

겨우내 책들이 고요히 잠든

도서관 한쪽

 

공사장 흙먼지로 지은

내 이름의

시집 한 권 끼워 넣었다

 

 


 

 

한종훈 시인 / 유전(遺傳)

 

 

농사에 때가 따로 있겄냐

해 덜 쬐고 비 안 오면 하는 거라

농사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이라

아빠도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이제 겨우 하는 거라

뭐 알아여 영 방거치라

순 치고 풀약 치고 알 솎고 봉지 씌우고 때 되면 따고

상중하 나눠 담고 즙도 짜고

더울 때 일이 젤 많아여

땀이건 포도건 주렁주렁 달리여

나무가 너무 낮아여

허리 한번 숙이면 새참 먹을 때까지 피지도 못해여

우리 집안 얼굴 시커멓고 키 작은 거 다 포도 농사 때문이라

근데 일하려고 폼 잡으면 꼭 비가 와여

옛날에 아빠가 객지에서 어쩌다 할아버지 포도밭에 가거든

그때 꼭 비가 와여

오죽하면 할머니가 농번기 때 오지 마라 했겠나

비 와서 일 못 한다고

너도 방학 때 어쩌다 일손 거든다고 오면

마른하늘에 소나기 내리잖아

그거 다 우리 집안 어른들이 내려주는 비라

손주 허리 숙이지 말고 그늘막 가서 쉬라고

그게 다 유전(遺傳) 아니면 뭐라

 

 


 

 

한종훈 시인 / 달걀 한 판

 

 

 첫 휴가 복귀 때 할매가 선임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걀 한 판때기

삶아줬어 그때는 달걀이 얼마나 귀했는지, 한 알 두 알 먹다 보니 맛있는 기라 부대 가는

기차에서 그걸 혼자 다 먹었지 뭐라 할매가 그때 몸이 많이 안 좋을 때라 그래서 목이 메

도록 씹고 또 씹었어 아이고 그런데 밤새도록 방귀가 뿡, 뿡, 뿡, 냄새는 또 얼마나 고약

해여 새벽에 불이 딱 켜지더니 어떤 새끼라? 고참이 고함치는데 이병! 하자마자 주먹이

날라왔어 퍽, 퍽, 얼굴이 달걀 깨지듯 왕창 깨졌지 뭐라

 

 턱이 빠지도록

 배가 터지도록

 얼굴이 깨지도록

 꾸역꾸역 밀어 넣는

 어머니가 싸주신 달걀장조림

 

 내 나이 서른 살에

 퍽퍽한 서른 알

 

 


 

 

한종훈 시인 / 일부

 

 

내부 괴롭힘은 절대 아닙니다

끈질긴 변명에

군화 끈으로 세상을 잠근

김 일병은 말이 없다

 

건강하게 수술받으실 겁니다.

척추가 아파 엎드려 있던 환자는

의사 얼굴 한 번 보고

간호사 손에 수술이 끝났다

 

저희 목사님은 성경을 3천 번 읽으셨어요

십자가 뒤에서 추행당한 소녀

신은 사라지고 역신만 남았다

 

저녁 뉴스 앵커의 마지막 멘트,

이것은 일부의 문제입니다

 

- 반년간 《시에티카》 2023년 상반기호

 

 


 

 

한종훈 시인 / 늙은 고독

 

 

자식과 연을 끊고

혼자 살았다는 노인

 

도둑 든 것처럼 널브러진 방

살점이 뜯긴 돼지 저금통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먼지 닦고 때 빼고 광내서

서둘러 가져가는데

 

열린 적 없는 유서 혼자

하얀 먼지 입은 노인을 지키고

두 손 포개어 합장하듯 쥔

주민등록증

 

액자 속 웃는 가족들

바닥에 엎어져 조문을 한다

 

-반년간 《시에티카》 2023년 상반기호

 

 


 

한종훈 시인

경북 상주에서 출생. 2021년 《다층》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