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종훈 시인 / 배달의 민족
형은 폭염을 가로지르며 바퀴를 굴렸다
아, 죄송합니다 음료를 쏟았습니다
방지턱을 넘을 때 쏟아지는 얼음 소리가 철렁, 형의 마음도 흘러내렸을 것이다
고개 숙이며 헬멧을 벗자 땀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쏟은 음료 대신 커피 한 잔을 더 만들었다 형이 계산한다는 쪽지와 함께
그리고
지역 신문에 실린 음주 차량에 치어 사망한 이름 석 자
여전히 길 어딘가에서 형은 바퀴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시집 『가난은 유통기한이 없다』에서
한종훈 시인 / 닮은 것들
뾰족한 연필 부드러워지고
딱딱한 비누 매끈해지고
뻑뻑한 신발 편해지고
떳떳한 책 보드레지고
우리 엄마 무릎
삐걱거리고
한종훈 시인 / 내 집 마련
하얗게 파마한 벚나무에 낯선 새가 갈색 둥지로 머리핀을 끼워 넣었다
겨우내 책들이 고요히 잠든 도서관 한쪽
공사장 흙먼지로 지은 내 이름의 시집 한 권 끼워 넣었다
한종훈 시인 / 유전(遺傳)
농사에 때가 따로 있겄냐 해 덜 쬐고 비 안 오면 하는 거라 농사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이라 아빠도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이제 겨우 하는 거라 뭐 알아여 영 방거치라 순 치고 풀약 치고 알 솎고 봉지 씌우고 때 되면 따고 상중하 나눠 담고 즙도 짜고 더울 때 일이 젤 많아여 땀이건 포도건 주렁주렁 달리여 나무가 너무 낮아여 허리 한번 숙이면 새참 먹을 때까지 피지도 못해여 우리 집안 얼굴 시커멓고 키 작은 거 다 포도 농사 때문이라 근데 일하려고 폼 잡으면 꼭 비가 와여 옛날에 아빠가 객지에서 어쩌다 할아버지 포도밭에 가거든 그때 꼭 비가 와여 오죽하면 할머니가 농번기 때 오지 마라 했겠나 비 와서 일 못 한다고 너도 방학 때 어쩌다 일손 거든다고 오면 마른하늘에 소나기 내리잖아 그거 다 우리 집안 어른들이 내려주는 비라 손주 허리 숙이지 말고 그늘막 가서 쉬라고 그게 다 유전(遺傳) 아니면 뭐라
한종훈 시인 / 달걀 한 판
첫 휴가 복귀 때 할매가 선임들이랑 노나 먹으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걀 한 판때기 삶아줬어 그때는 달걀이 얼마나 귀했는지, 한 알 두 알 먹다 보니 맛있는 기라 부대 가는 기차에서 그걸 혼자 다 먹었지 뭐라 할매가 그때 몸이 많이 안 좋을 때라 그래서 목이 메 도록 씹고 또 씹었어 아이고 그런데 밤새도록 방귀가 뿡, 뿡, 뿡, 냄새는 또 얼마나 고약 해여 새벽에 불이 딱 켜지더니 어떤 새끼라? 고참이 고함치는데 이병! 하자마자 주먹이 날라왔어 퍽, 퍽, 얼굴이 달걀 깨지듯 왕창 깨졌지 뭐라
턱이 빠지도록 배가 터지도록 얼굴이 깨지도록 꾸역꾸역 밀어 넣는 어머니가 싸주신 달걀장조림
내 나이 서른 살에 퍽퍽한 서른 알
한종훈 시인 / 일부
내부 괴롭힘은 절대 아닙니다 끈질긴 변명에 군화 끈으로 세상을 잠근 김 일병은 말이 없다
건강하게 수술받으실 겁니다. 척추가 아파 엎드려 있던 환자는 의사 얼굴 한 번 보고 간호사 손에 수술이 끝났다
저희 목사님은 성경을 3천 번 읽으셨어요 십자가 뒤에서 추행당한 소녀 신은 사라지고 역신만 남았다
저녁 뉴스 앵커의 마지막 멘트, 이것은 일부의 문제입니다
- 반년간 《시에티카》 2023년 상반기호
한종훈 시인 / 늙은 고독
자식과 연을 끊고 혼자 살았다는 노인
도둑 든 것처럼 널브러진 방 살점이 뜯긴 돼지 저금통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먼지 닦고 때 빼고 광내서 서둘러 가져가는데
열린 적 없는 유서 혼자 하얀 먼지 입은 노인을 지키고 두 손 포개어 합장하듯 쥔 주민등록증
액자 속 웃는 가족들 바닥에 엎어져 조문을 한다
-반년간 《시에티카》 2023년 상반기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길원 시인 / 집에 대한 예의 외 6편 (0) | 2025.11.08 |
|---|---|
| 주용일 시인 / 그런 사람이 있었네 외 6편 (0) | 2025.11.08 |
| 권지현 시인 / 우주를 쪼개다 외 6편 (0) | 2025.11.07 |
| 송승언 시인 / 끝없는 삶 외 6편 (0) | 2025.11.07 |
| 하미정 시인 / 계절은 미완성 외 3편 (0) | 2025.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