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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언 시인 / 끝없는 삶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자 본체와 분리되어 있던 영혼이 돌아왔다 영혼이 탈주하면서 했던 생각들 이를테면 더는 생각하지 말자던 생각들 그런 것들도 영혼과 함께 돌아왔지만 더는 생각하지 말자던 생각들에 대해서 더는 생각하지 말자 오늘 저녁의 삼각김밥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입에 벌리고 밖으로 나가니 신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처럼 나는 꿈꾼다 당신의 뼈를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밤과 골수들을, 내 생각은 이것뿐 생각에 뼈라는 게 있다면 내 생각은 부러져 있다.
-시집 <사랑과 교육>에서
송승언 시인 / 램프
우리들의 마음속에 잿더미가 쌓여 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생각을 헤쳐 나간다. 램프를 들고. 흔들리는 램프 안에 불이 흔들린다. 이것이 너의 표정이다. 너의 표정은 죽어 가는 사람의 숨결처럼 아득하게 퍼져 나간다. 램프를 들고 복도의 잿더미를 헤쳐 나가면 잿더미의 복도에서 램프를 들고 다가오는 사람. 그는 나에게 비어 있는 한손을 내민다. 악수할 수 없는 손을.
- 시집 〈사랑과 교육〉 민음사 | 2019
송승언 시인 / 영화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영화는 사람 없는 가로수 길을 걸어간다. 이어지는 돌담과 함께 지나가는 기억 몇을 메만진다. 그러나 영화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거울을 보는 대신 한 사람과 만나 밥을 먹고 한 사람과 잠을 자다가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실패하며 영화의 전신은 쏟아지는 빛에 수백 번 구타당한다. 영화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들은 몇 있다. 가족보다 소중한 어쩌면 영화 자신보다 소중한 그러나 이 사회보다 소중하지는 않은 그들은 저마다 다른 병을 앓고 있다. 그들 중 몇이 예상되지 않는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나거나 그들 중 몇이 다음 계절에 더는 등장하지 않는 사이 그러나 영화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영화는 가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를 시선의 공포를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영화는 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이 모든 일상이, 이 파탄이 공개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영화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여름비 쏟아진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되지 않는 시간들이 흘러내린다. 영화는 이불을 반쯤 걷어내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다. 빗소리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진짜 친구는 아니라는 생각에 진짜 친구를 생각한다. 서로 욕할 수 있는 친구. 서로 때릴 수 있는 친구. 서로 증오할 수 있는 친구. 그건 친구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하는 진짜 친구를.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당신 쪽을 잠깐 노려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영화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송승언 시인 / 물의 감정
나는 물을 좋아하고 너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증으로 대립한다
물은 너의 감정이다 너의 기분에 따라 그날의 컵이 바뀌고 물의 온도가 달라진다 태도는 항상 미온적이다 너는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누워 있다 나갔다 들어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너는 금붕어 두어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기를 반복한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통 듣지 않는다 벽지는 자주 바뀐다 붉었다가 푸르렀다가, 꽃잎 무늬였다가 방울 무늬가 된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벽지는 젖어 있다 너처럼 물고기들은 벽의 감정을 배운다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거나 물고기는 식탁의 유리를 좋아하고 창의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잇는 아무것도 기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는다 우리는 생활로 대립한다
나는 출근하고 너는 출근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너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젖고 나는 젖지 않는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통 듣지 않는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빛은 닫힌 창으로 들어온다 너는 물을 마시고 물을 준다 물을 마시지 않고 물과 빛이 섞이는 양상을 바라본다
붉은 컵에 담은 물은 붉은 물이 되고 푸른 컵에 담은 물은 푸른 물이 된다 물고기들은 빛나는 물의 양상을 배운다
- 2011년 <현대문학> 신인상 당선작
송승언 시인 / 학예사에서
이런 영혼이 있었다, 이런 영혼이 있다, 그는 이런 영혼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영혼이 없었다. 복도를 따라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너는 복도를 따라 돌아다닌다, 청자를 잃은 소리처럼, 방향이 없는 아이처럼, 박물관에는 아무도 없다 어떤 것도 참고할 만했다. 파편 하나도 하찮은 게 없었다, 이것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던 자의 뼈다, 이것은 그의 그릇이며 이것은 그가 마시게 될 물이다, 유리관 속에 제시된 만물의 세계를 보기 위해 너는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 영혼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이에 말은 주인 없이 오래 떠 있었다, 잠이 덜 깬 유령처럼 복도를 울게 하는
-시집 <사랑과 교육> 민음사, 2019
송승언 시인 / 저녁으로
지장보살의 발 아래, 수원지가 불분명한 물이 솟았다 너와 나는 받아 마셨다
이 물은 맑고 투명하다 너의 검은 얼굴이 증거로 떠오르고 있다
검은 것은 얼굴이 아닌 물, 네 눈에는 언덕 아래 많은 묘지가 보이지 않는지
많은 것은 묘지가 아닌 집, 그곳에서 자고 있는 많은 사람들, 너와 나처럼 새벽에 모두 깨어나 여기로 오게 된다 빛 속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잉어 한 마리 전나무 그늘 사이에서 서로를 잃어버렸다
지장보살의 표정 아래 한없는 얼굴들이 흐르고
-시집 『철과 오크』, 문학과지성사, 2015
송승언 시인 / 개는 모른다 모르는 개는 안다 개는 모른다. 이 장난감 안에 든 간식을 어떻게 꺼낼 수 있는지. 그러나 개는 안다. 곧 그 간식을 먹게 되리라는 것을. 개는 안다. 오늘 낮 당신의 외출은 개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난리.) 그러나 개는 모른다. 당신의 외출이 개의 간식을 만든다는 것을. 개는 모른다. 바깥이란 온통 개가 모르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러나 개는 안다. 그렇기에 바깥이 흥미롭다는 것을. 개는 모른다. 당신이 오늘 왜 슬픈지. 그러나 개는 안다. 당신이 슬프다는 것을. 개는 모른다. 당신이 아는 많은 것들을. 그러나 개는 안다. 당신이 모르는 많은 것들을. 개는 안다. 당신이 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러나 개는 모른다. 당신이 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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