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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림 시인 / 능소화 붉은 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7.
허림 시인 / 능소화 붉은 밤??

허림 시인 / 능소화 붉은 밤​​

 

초희네 집

구름같이 모란이 벙글고

젖무덤만한 나무수국 뭉글뭉글 멍울지고

붉은 속살 터지듯 배롱나무 꽃 핀다

서로 등이 되어 휘감은 능소화 붉다

누가 피는 꽃을 말리겠는가

유독 붉은 발자국으로 내려앉아

지극에 이르는

꽃의 금당

피는가 싶게 벌고

벌었다 싶으면 지는

달, 그늘 아래 앉아

꽃으로 살다간

그 여자

마당 가득 서성이는

붉은 꽃잎 본다

 

-시집 「말 주머니」에서

 

 


 

 

허림 시인 / 그늘

 

 

사진 찍거나 그림 그릴 때, 서 있든 앉아 있든 그대의 뒤 배경이 되는 곳

 

풍경을 세워두고 오래 바라본다

 

유리의 존재처럼, 깨뜨리거나 상처가 되는 투과된 내안을 바라보는

 

그대, 굽은 생은 사랑인가.

 

 


 

 

허림 시인 / 어떤 사랑은 기억나지 않는 게 좋았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했지만

꼭 기억해야 할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번 더듬어 봐요 찬찬히 그때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월둔은 기억나요 있자나요 소리 잘하던 그 사람

작달마하고 왜 집에도 놀러 왔었자나요

 

눈까풀이 떨리는 것 같더니

아 몰라 머리 아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그만

 

일부러 기억하려 않는 건지 기억나는데 모른 척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기억과 기억 사이

 

그 겨울에 먹던 조풍내이를 먹고 싶다안나

달기자반이나 강냉이 뭉생이를 해오라지안나

땅콩엿을 고라하지안나 원

 

못먹고 죽은 구신이 들렸는지

쇠터울 안씨댁은 굿 한번 해보라고 다녀가고

 

눈 내리고 길이 지워지듯

어떤 사랑은 기억나지 않는 게 좋았다

 

 


 

 

허림 시인 / ~수록

 

 

 손바닥보다 작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았다 멜로 영화 뻔 한 사랑과 이별 그러나 사랑은 통속적이어서 아름답다 이별 또한 비극적이어서 인간적이다

 ‘사랑하는 걸 어떻게 숨기냐’는 대사가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철학적이거나 사색적이지 않아 뭉클하다. 몸으로 사는 나는 늘 아프다 쎄빠지게 일하서 뭐하냐,는 말이 아프고 꿈이 뭐냐,는 말에 대답할 수 없어 아프다

 그래도 ~수록 사랑할 수밖에

 

 


 

 

허림 시인 / 봄날의 방언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아리이요오 아리라앙 고오오개에르을 너머 간다

나를 버어어리이고오 가시는 니이믄으은 심니도오 모오옷가아서 발뼝 난다

 

고백할 것은 많은데

그대는 이미 떠났다

용서한다며 꽃은 핀다

눈 쌓인 앞산을 바라보며

언제 오냐고 또 방언을 했나보다

명근네 보연네 기순네가 나생이 캐러가며

못 알아듣는 소리 말고

봄 되면 조금씩 몸 풀리고 넋도 놓고 다닌다고

뭔가 좀 캐 먹으라고 한다

 

그려 방언이며 헛것이 괜히 보이겠니

 

 


 

 

허림 시인 / 너하고는 첫사랑이구나

 

 

 그 집 돌담 라일락은 흰색 꽃이 핀다

 한동안 흰색 라일락은 토종이라느니 원래 토종은 수수꽃다리라느니 누가 가져가서 개량하여 보라빛 라일락이 되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나는 그 집 네째 딸이 쓴 시를 읽고 편지를 쓴 적 있다 브라우스 위로 도톰하게 도드라진 가슴에 설레이던 시절이었다 라일락이 한창이었고 추신으로 라일락 꽃잎을 붙인 편지 문틈에 꽂아놓고 그녀가 꺼내가기를 지켜보던 돌담 뒷길

 달빛으로 풀리는 라일락꽃향기 은은하였는데

 

 향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바람에 섞인 문장의 향기

 

 


 

 

허림 시인 / 줄

 

 

줄 하나가 내려오고 있다

이십오 층 아파트 옥상에 걸린 밧줄

바람 불어가는 쪽으로 밀렸다가

이내 불어오는 쪽으로 밀려간다

줄에 내가 앉아 있다

그네를 타듯 벽면을 다듬고

페인트를 칠하고 유리를 닦는다

집을 짓는다

줄이 내 몸이다 받아들이기까지

오억 만 번도 더 오줌을 지리며 질려 발발 떨었다

줄은 늘 불안하지만

줄은 내가 안도하는 삶의 방식

나는 줄을 타고 노래를 한다

줄을 타고 연애를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고 꿈을 꾼다

줄 잘못 서서 벌 받던 시절도 있었다

줄 잘 서서 밥을 먹은 적도 있었다

줄을 대려고 돈을 걸거나 목숨을 건 적도 있었다

그 줄에 악착같이 매달려

사랑한다 속삭이던 날도 있었다

동백이 지고 목련이 피고

벚꽃이지고 이팝꽃 피는 사월이었다

우리가 같이할 수 있었던 게

섹스밖에 없었다는 문장을 읽던 날이었다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줄을 타고 내려와

이십오 층 아파트 그늘로 들어간다

줄이 팽팽했던 긴장을 풀고

바람에 몸을 맡긴다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2019

 

 


 

 

허림 시인 / 혼자, 라는 말이 무서워졌다

 

 

지난 섭생의 시간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점심에는 밥과 두부조림 날두부 김치

고등어조림 오이무침 어묵볶음 미역무침

후식으로 밤식빵과 헤즐럿 커피

여기에 내 속을 꼴 만한 뭔가 있나

혹시 날두부가 너무 차갑지 않았나

너와 나 사이 상극의 조합이 있었나

달려가 앉으면 좌ㅡ악

어제 아침은 언 빵을 녹여 플레인과 우유 거기에 핫바를 먹었다

하루 동안 먹은 양은 설사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내심 장염이거나 급체라고 짐작해보지만 오늘은 일요일

무작정 견디는 것 견뎌야하는 것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항문의 언저리가 너덜해지고

짐승들이 우는 시간마다 깼다 눕다 견디다

겨우 아침이 되어 서둘러 동네 의원을 찾아 몸을 보인다

그는 청진기로 몸의 소리를 듣고

몸의 소리를 처방한다

‘먹을 것 앞에서 욕심 부리지 마세요’

언제 먹을 것이 생길지 모르는, 생겼을 때 채우고 보는 야생의 식생

혼자, 라는 생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허림 시인

강원도 홍천 출생. 강릉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2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말 주머니』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거기, 내면』 『엄마 냄새』 『누구도 모르는 저쪽』 등.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활동지원금(2007년), 문학나눔 복권기금(2012년, 2013년)을 받음.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A4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