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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상규 시인 / 도둑맞은 편지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9.
한상규 시인 / 도둑맞은 편지

한상규 시인 / 도둑맞은 편지

 

 

 우리는 유리 빌딩에서 거위 모자를 쓰고 검은 그림자를 입으며 램프를 만든다 우릴 위해 환호하는 손바닥 안에서 램프를 두드리면 지워진 입에서 네가 나타난다 너는 머릴 숙인 이빨들 사이 자라는 물푸레나무 문패를 만들면 거꾸로 내리는 눈들은 문신을 미로처럼 램프에 새긴다 우리는 어느새 양팔이 끊어진 램프 문지르고 문질러 주둥이가 입처럼 납작해지면 너에게 편지를 쓴다 너는 램프의 주인 우리는 너에게 편지를 쓰고 램프를 훔친다 너는 편지의 주인 도둑맞은 램프 우리는 램프를 훔치고 편지를 계속 만든다 너는 램프 우리는 분열하는 편지 무한 증식하는 주인 마주 앉아 편지를 쓴다.

 

 


 

 

한상규 시인 / 가면

 

 

 집에 돌아와 가면을 벗는다. 글러브 모양을 한 얼굴이 툭 떨어진다. 세포 분열하는 얼굴조각들, 조각들은 방으로 거실로 복도로 튕겨져 거울을 덮는다. 잠들어 있던 거울을 깨운다.

 

 오른손잡이인 내가 왼쪽 타석에 들어선다. 헬멧을 쓰고 방망이를 휘두른다. 나는 왼쪽 오른쪽으로 달린다. 방망이가 오른쪽 왼쪽으로 달린다. 헬멧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함성보다 더 높이 떠오른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왼쪽으로 1루를 돌아 오른쪽으로 3루를 돌아 홈플레이트로 들어온다. 떨어지는 헬멧을 받는다. 헬멧의 오른쪽이 왼쪽이 텅 비어 있다

 

 나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쓰러진다.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에워싼다. 그리고 가면을 벗어 나의 얼굴에 하나씩 씌워준다.

 

 


 

 

한상규 시인 / 오늘은 데려오지 못했다

 

 

데리다를 데려오지 못하는

오늘은 함께 하지 못했다.

 

데리다를 데려오지 못한 것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는

고도가 오늘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후의 섬에 숨어 사는 걸리버에게

데리다가 도착하지 못한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도

아직도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블리디미르가

기다리는 오늘이 어제가 아니고 내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상규 시인 / 봄

 

 

봄은

타버려서 웃음짓는 꽃

목 졸린 바람

잠수하는 나무

꾸벅꾸벅 조는 트럭

몽유병이 생긴 출석부

물 먹는 사물함

상처 입은 액자

 

 


 

 

한상규 시인 / 겨울, 12월 31일, 다시 겨울

 

 

겨울은 1월에도 12월에도 찾아온다.

1월 1일 겨울은 처음이지만

12월 31일 겨울은 끝이다.

 

겨울

12월 31일

늦은 밤

눈이 내린다

내리는 눈은 마지막이지만 다시

처음이 된다.

내리는 눈과 이미 내린 눈이

엉겨붙는다.

 

겨울이

마지막 눈을 내리게 하고

겨울이 다시

처음 눈을 내리게 하는 것인지

눈이

겨울을 처음 오게 하고

 

눈이 다시

마지막 겨울을 오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다시

처음인 눈을 맞아

하얗게 탈색된 검은 눈썹 위

내리는 눈물 아래에서

12월 31일 늦은 밤

나는 눈물 흘리며 웃음 짓는다.

 

 


 

 

한상규 시인 / 아직도 지구는 둥글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새겨진 알약을 약국에서 사서 먹었어요. 이 약은 매일 밤 어디론가 돌아다니는 검은 고양이의 침에서 나온 열매에요. 이 열매를 따라가면 람데시비르를 먹고 에볼라가 사라진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거에요. 언제쯤 우리는 페트병을 집 대신 갖게 된 소라게의 진짜 집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아카풀코 해변에선 발광 플랑크톤이 돌아와 밤마다 해변이 반짝인다네요. 이제는 떠다니는 먼지와 쓰다버린 핸드크림에서 나온 기름을 kf94가 막을 수 없지만 브루스 리와 카림 압둘자바는 아직도 대결을 해요. 그의 노란 운동복과 아디다스 운동화에선 먹다 남은 아보카도 씨앗이 발견되었다네요. 그 가 꿈에 나와 장국영과 대화를 해요. 장국영이 만우절날 떨어진 만다린 호텔 에선 쓰다 만 시가 발견되었어요. 그 시에는 골프장에서 티샷을 하다 허리를 다친 시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 시인이 쓴 시에선 프롤레타리아 냄새가 나요. 위장을 잘 하는 소라게는 아직도 펫트병이 자기 집인 줄 알고 먹다 남은 아보카도 씨앗에선 새싹이 돋아나 사람들은 아직도 지구가 둥글다는 걸 믿지 못해요. 지구가 둥글다면 람데시비르를 먹은 노스트라다무스가 kf94마스크를 쓰고 브루스 리를 아카풀코 해변에서 만날 거에요. 그렇지 않더라도 실망 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요 삶은 언제나 우리를 속이고 지구는 아직도 둥글잖아요.

 

 


 

 

한상규 시인 / 예언자

 

 

마스크를 두 겹씩 껴야만 바이러스가 비껴 나갈 것이다. 중고거래 앱을 열어 세계명작동화 그림책을 전송하면 기다리던 택배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라 이번주 팝업창엔 여태껏 보지못한 신작공개가 임박했다는 알림창이 뜰 것이다. 끓이기만 하면 유명식당의 부대찌개를 맛볼 수 있는 밀키트를 구매해 고화력 인덕션 버튼을 눌러라 보고 듣고 맛보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고 진실은 항상 곁에 있을 것이다. 진실은 바이러스와 같고 마스크는 바이러스를 비껴 나가게 할 것이다. 믿는 자만이 존재하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행하여질 것이다. 믿어라 그것만이 구원이다.

 

 


 

 

한상규 시인 / 비와 함께 춤을

 

 

 학교에 오면 늘 비가왔다. 그는 비를 화장실 세면대에 받아놓고는 이 사이에 낀 이물질을 제거해 깨끗해진 입을 보며 웃었다. 종이 울리면 늘 그렇듯이 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 날인가 늘 오던 비가 오지 않던 날 아침 그는 세면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이를 닦지 않았다. 깨끗하던 이가 하나 빠졌다. 빠진 이에서 한 쪽집 개발만 있는 붉은 게가 나타났다. "거주지 조사표에 한 쪽 집게발만 있는 게 만조사하지 않는 것은 참 재미있구나" 그의 말에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가발을 팔러 학교에 다니곤 했다. 언제나 비를 모아 머리카락을 세척하고 가발을 만들어 팔았지만 아무도 가발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다닌 학교엔 빗물을 받아 깨끗한 물로 만드는 세겹의 여과기가 층마다 설치되어 있었지만 가발은 씻을 때마다 더러워졌다

 그가 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그가 팔던 가발은 찢어지고 흩어져 검은 비처럼 학교에 내렸지만 세겹의 여과기를 거쳐 깨끗한 물이 되었다.

 

 


 

한상규 시인

1977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同 대학원 국어교육대학원 졸업. 2003년 《시와세계》등단. 시집 『나와 파르마콘과 생각버스』. 2019년 초.중등 인문교육 활성화 교육부 장관 표창. 2022년 시와세계 작품상 수상. 현재 동북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