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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성 시인 / 상처에 관한 변주곡 물속에 발목을 담고 사는 새들의 전생은 물이었다 뼛속을 비우고 하늘로 뛰어드는 것은 깃털을 가다듬기 위한 것 파득거리는 물고기를 물고 솟아오르는 물총새가 바람으로 물비린내를 닦으며 날아갔다 물속에 사는 것들이 물 밖이 궁금할 때는 물의 창문을 열어놓고 출렁출렁 제 속의 소리를 멀리 떠나보낸다 물의 풍경 흔들리지 않게 소금쟁이와 검은풀잠자리가 움켜쥐고 있는 물의 낯을 얇게 뜯어내면 수천 장의 풍경이 펼쳐진다 강 하구까지 오는 동안 출처가 지워진 물길이 강의 깊은 속까지 흘러 들어가서 우리도 모르는 상처가 섞이면서 흔들리는 것이다 물의 내장으로 스며드는 것 중에는 새들의 붉은 발과 부리가 일으키는 굴절의 소리도 있다 -시집 <모란의 저녁> 시인동네. 2023
김경성 시인 / 따뜻한 황홀
어떤 나무는 절구통이 되고 또 다른 나무는 절구공이 되어 서로 몸을 짓찧으며 살아간다
몸을 내어주는 밑동이나 몸을 두드리는 우듬지나 제 속의 울림을 듣는 것은 똑같다
몸이 갈라지도록, 제 속이 더 깊게 파이도록 서로의 몸속을 아프게 드나든다
뒤섞인 물결무늬 절구통 가득히 넘실대며 절구공이 타고 흐른다
김경성 시인 / 망고나무와 검은 돌
나뭇잎이 빙그르르 맴돈다
망고나무 몸속의 것을 파내고 물을 들여놓으니 나이테가 풀리면서 물이 흔들린다
씨앗에 날개를 달아서 가벼운 망고나무 그릇 우기의 바람과 비를 들인 탓에 물 위에서도 둥둥 뜬다
나뭇잎이 깨어나서 푸른 말을 뱉어내니 아프리카 검은 돌 속의 물고기 지느러미도 꿈틀거린다
몇억 년 전 어떤 기류에 휩싸여 몸을 움츠리고 호흡을 멈추었을 때 물과 빛은 사라지고 긴 잠에 들어 말문을 닫았던
망고나무 그릇 옆에 검은 돌접시를 놓으면 얼룩말에 앉은 흰 새가 날갯짓하고 망고나무 씨앗도 깃을 편다
조각칼을 대면 흰 강줄기가 흐른다는 아프리카 검은 돌 속에서 나온 물고기가 팔딱거린다
망고나무 푸른 그늘을 도려내어서 검은 돌접시에 담아 놓자 강물이 출렁인다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말들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김경성 시인 / 맨드라미
그의 근원을 찾아가면 주름진 길의 가계가 있다 길 바깥에 촘촘히 앉아있는 수천 개의 검은 눈이 있어 꿈속에서라도 어긋날 수 없다
단단하게 세운 성벽은 안과 밖이 없다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바깥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바깥이다
어디든 틈만 있어도 잘 보이는 눈이어서 지나치지 않는다 자리를 틀면서부터 새로운 가계가 시작된다 뜨거운 불의 심장을 꺼내 기둥을 세운 후 세상과 맞선다
처음부터 초단을 쌓는 것은 아니다 제 심지를 올곧게 땅속 깊이 내리꽂은 후 뱃심이 생기고 꼿꼿해질 때 온 숨으로 쏘아 올리는 붉음
높이 오를수록 몇 겹으로 겹쳐가며 치를 만들고 면을 서서히 넓혀가며 하나의 성이 세워진다
상강 지나 된서리 때리는 새벽 수천 개의 검은 눈동자가 성문을 바라보고 있다 수탁이 벼슬을 세우고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날 듯 나는 듯 소란스럽다
김경성 시인 / 음계를 짚어가는 손가락이 낯설다
오래전에 다 익혔던 낡은 악보처럼 둥그렇게 휜 목덜미가 아니어도 방파제에서 홀로 연주한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에는 충분히 위안이 되는 시간
예감인 듯 바람이 불고 마른번개가 일며 아코디언을 수없이 폈다가 접으며 바람을 읽는 바다 그 젖은 마음이 멀리 퍼져 방파제를 넘어섰다
건기가 발을 빼고 우기의 이마가 보이는 계절 방파제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의 눈에도 바닷물이 차오르고 바다를 들인 기타로 연주를 하는 젊은 여행자의 낯선 손가락이 어느 순간 따스했던 기억을 불러낸다
저만치 홀로 앉아있는 한 사람, 어떤 슬픔을 지고 있는지 오른쪽 어깨가 내려앉아 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처연한 상실도 때로는 뿌리가 돋느라 짙은 향기를 낼 적이 있다고 낯선 손이 빚어내는 소리를 들이며 기울어졌던 몸이 점점 펴지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람이 되어서 음계를 짚어가는 낯선 사람의 마음 안으로 다 들어갔다 저녁 하늘이 바다보다 더 짙푸르다
김경성 시인 / 새집
몸을 반으로 접어야 들어갈 수 있는 종이상자의 문을 뜯어냈다 씨방이 둥근 접시꽃은 꽃도 둥글어서 해마다 그 자리에서 아날로그로 피어나고 으깨어진 무릎을 펼 수 없어서 구부린 채로 살아가는 나는,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종이상자를 커다란 나무라 불렀다, 부채살 서까래처럼 길게 뻗은 가지에 옹이 진 자리가 깊게 새겨 놓은 문패 같았다 잎이 피고 지는 사이에 마음자락도 너울져서 숲이 되기도 하고 눈물 번지듯 비가 내리면 닫히지 않는 창문으로 여울목이 흐르고는 했다 등줄기에서 자라는 담쟁이가 맞지 않는 문틀을 붙잡고 문밖으로 팔을 뻗칠 때 방안 가득히 들어오는 푸른 바람이 허파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빠져나가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허공의 지문을 읽어 내는 나무의 겨울눈目처럼 한 그루 나무 속에 깃들어 사는 생이 긍휼하다 -『문예바다』 (2017년 봄호)
김경성 시인 / 목기미해변에 닻을 내리다
끓어진 전선을 목에 걸친 전봇대,백사장에 발목을 묻고 있다 전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오래된 말들이 길 위에 떨어져 있다
떨어져서 굴러다니던 말들은 전봇대와 전봇대를 넘나드는 새들의 몫이다 먼 곳의 소식도 그의 몸을 타고 흘러왔고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들은 선단여 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지금 남아있는 새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그때의 새가아니고 그때의 물이 아니고 지구를 수만 번 돌다가 온 바람만이 그대로일 뿐,
공룡이 발톱을 세워서 써놓은 유적은 느다시 구릉에서 흘러나온 빗물이거나 암벽 사이로 고개를 내민 금방망이 꽃이라고 물고기가 산란하는 동안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목기미해변에 얼굴을 묻은 닻들은 농염한 바닷물에 녹꽃이 피고 이따금 목에 걸려드는 해초는 등지느러미가 아름다웠던 물고기의 말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통보리사초밭에 부리를 묻은 검은머리물떼새 살아 숨 쉬는 것들의 뜨거움이 목기미해변을 따라 흘러 다니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물처럼 드리워져 있다 닻의 그림자를 재며 생의 농도를 읽는 목미기해변 낡은 전봇대도 모래 구릉에 닻이 된 채 전선을 타고 흘러갔던 것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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