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정환 시인 / 늦가을 노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2.
김정환 시인 / 늦가을 노래

김정환 시인 / 늦가을 노래

 

 

저문 날, 저문 언덕에 서면

그래도 못다한 것이 남아 있다

헐벗은 숲속 나무 밑, 둥치 밑에

스산한 바람결 속 한치의 눈물 반짝임으로

마지막인 것처럼, 가랑가랑 비는 내리고

그래도 손에 잡힐 듯

그리운 것이 있다

살아남은 것들이여 부디

절규하라 계절이 다하는 어느 한숨의 끝까지

우리들 사랑노래는 속삭여지지 않는다

기억해다오 어느 외침의 미세한 부활과

절망과 거대와

그리고

어떤 질긴 사랑의 비린 내음새를. 안녕.

 

 


 

 

김정환 시인 / 막걸리

 

그 중년 여자는 내내 중앙청 타령이었는데

무교동 어느 술집에선가

이러지 마요 손님, 내 중앙청은 아직도 쌩쌩하다요

물건도 물건 나름이지 그걸 가지고 얻다 대요 손님.

그 중년 여자는 내내 중앙청 타령이었는데

나는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 아니라도

탁한 막걸리 마실 때마다 그 여인 생각난다

생각난다, 막걸리 구역질 속에서 떠오르는 그녀의 몸둥아리 중앙청

그러나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이 고향 어디엔들 있으랴

평소에 별빛처럼 아롱진

영롱한 아름다운 우리네 생활이 어디 있으랴

아아 소갱 바가지 막걸리, 곪아터진 고름 질질 흐르는

한가운데서 끈끈하게 살아 숨쉬는

비린내 싱싱한 우리네 삶밖에

무엇이 또 남아 있을수 있으랴

그날도 슬플 것은 영영 없었다

그녀의 그 냄새 묻은 몸짓은

그녀의 그 새우젖 묻은 치마폭은

다만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고

그때서야 잃어버린 것들의 귀중함을 알며

잃어버린 상태의 치열함을 살아가는

어떤 '의미 찾기'였을 뿐이다

원효대사처럼

나는 그 여자가 토해낸 중앙청과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그날도 취할 리야 영영 없었다

 

 


 

 

김정환 시인 / 마포 강변 동네에서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당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육신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했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아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번 떠나가고 있는 줄...?

 

가난하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판자집만 들어선

하필이면 이 마포, 강변동네에서.

 

 


 

 

김정환 시인 / 스캔들 혁명사

 

 

베스트셀러 신정아 고백록 주요독자가 50대라니

50대인 나 기성회비라는 말의 슬프고 장한 뜻 아는

마지막 세대였다가 시시껍절한 섹스 스캔들이 일약

정치적 과격으로 되는

최초의 지저분한 세대에 속하고 나의 혁명사

육체에 밴 추문을 씻어내는 식일 밖에 없다.

의식의 잔인은 얼마나 완화해야 기억되지?

자살을 뺀 들뢰즈와 알튀세르는 레닌 뺀 마르크스와

같다는 말이 고무줄 없는 빤스 운운으로 들린다.

왜 사람들이 명작 건축에서 자연사하지

않는가, 왜 자살하거나 피살되는가?

집을 나서면 우리 동네 제법 번듯한 건물 지하가

반 너머 성인용품 시뻘건 물감에 허리까지 잠겼고,

그것에 발 담그며 내가 되뇐다. 가장 야하고

청초한 말, '여자는 온몸이 악기다.'

가장 오래되고 언제나 개인적인 말, 가장

넘치나 가장 아껴 쓰는 말, 가장 육감적이지만

냄새와 상극인 말, '여자는 온몸이 악기다.'

혁명사보다 혁명 전후사가 더 혁명 실패사보다

혁명 살아남은 차르 귀족 딸 고생 얘기가 더 흥미로운

나의 사태에 나는 어디까지 찬성할 것인가.

오래전 죽은 벗의 오랜만 생가를 보았다. 동생 찾아

월남, 전쟁과 혁명 및 남한과 무관하게 오래 사셨던

큰아버지 문상하고(정환아 사는 게 정말 지겹다')

식구들과 함께 탔던 구포 시내 경전철 덜컹대는게

이승도 저승도 아닌 상자 속이고 그 앞에 철길

아무리 뻗어도 아기자기했고 더 멀리 안개 속 낙동강

철교, 참화를 벗고 다리가 미끈했다.

행군이 운명이라는 소리 빤하다.

생이 어떤 사태인지도.정치는 70년대 민주화 운동

주역들이 아직도 제일 잘 하니 80년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었다. 정말 혁명사 쓰고 있구나. 벌써

미수꾸리나 하려 들고.... 내가. 나 말야? 어긋난 데

익숙해져 세상 살만하다 싶으면 세상이 더 어긋나

거기에 다시 맞추어 다시 살 만하다 싶으면 세상

어긋나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 이 악화를

파탄으로 정화(淨化)할 밖에 없을까? 그것들도 분명

우주가 있을 것이다. 자기들의 무한대를 닮았으나 자기들

지능으로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바다에

우렁쉥이나 이름 없는 수초들 말이다. '한 곳 더',

'조금만 더'는 그럴 수 없이 위대한 인간 언어지만

그정도로는 언감생심인 우주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아파트 정원에 봄이면 어김없이 육덕 좋은

엉덩이를 까는,

왜 사냐면 웃는, 민낯과 큰 절의 맥문동 같은 것들 말이다.

이천십이 년 오월 현재 그 사내

밤 열두시 넘은 전화 두 달째 없는 것 크게

기뻐하고 있다. 술 정신은 차린 모양이군. 정치와

시민 없고 정치 비판과 시민운동만 있는

세상 살 만한 동안.

그러나 세드나* 오 냉혹한 풍요.

북극 얼음 바다 속 고래와 바다표범 포유류 낳은

성스러운 말씀, 명명은, 마디마디 잘린 냉동

아이스케익 손가락들, 카약, 카약, 갈가마귀,

카약, 갈가마귀, 카약, 딸, 애원하는, 애비,

겁에 질린. 애원도 단검도 너무 잔인하여

분노에 달할 수 없는 생명이 운명의 단어 같은

모든 걸 밀어내고 맥락도 그 밖도 모종도 없이

밀어닥치는 신화 아니라 직접성의 지옥, 빙하기

제의로서 육체가 그냥 견딜 밖에 없는 악화와

심화로밖에는 종말을 앞당길 수 없는

혁명사 있었다. 다시 쓸 수 없다. 혁명 이전 혁명의

냉혈을 푸는

혁명사 쓰며 앉아있다.

 

*이누이트 신화 바다여신

 

 


 

 

김정환 시인 / 서울특별시 용산 4지구,

남일당, 355일, 쉿, 쉿, 바람소리

- 산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오 우리애들 아빠, 난데없는 불에 타 죽으며 얼마나 뜨거웠으리

죽음은 시간을 벗어나 수천만 년도 잠깐이겠으나

수억 년 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기약도 없는 비명의 이별은 더 아뜩한 낭떠러지인 것이오,

벼락 같은 당신의 죽음으로 살아남은

나의 생 또한 살아남았달 게 없는 생이겠으나

당신이 떠난 자리 홀연 어지러운 세상이 되고

역사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된

자리로 내 몸 안에 들어서는 것이오,

죽은 당신의 의로운 명예를 되찾기 위하여

불타는 당신을 3백 5십 5일 동안 이 세상에 세웠으니

당신의 고통을 백 배 늘인 죄가 이 세상의 나에게 있겠으나

나와 우리애들은 라면 끓이는 생계의

곤로 불에도 당신의 아픔을 새길 것이고

많은 사람들한테 서울에 내린 백년 만의 26센티미터 폭설이

아무리 흩날려도 산발 같지만은 않을 것이오.

발이 푹푹 빠지지 않아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 조선 역사의

시간은 저렇게 하얗소. 그렇소. 고통으로 아름답소,

고층아파트 창턱에 줄줄이 길게 얼어붙은

목숨도 당신의 죽음으로 아름답소. 비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소.

하나님이 있다면 그 절대의

주제를 변주하는 게 위대한 작곡가라 했고

그 변주를 다시 변주하는 게 연주자라 했고 언제쯤

정말 듣는다면

듣는 자의 연주는 가장 위대하다 했소.

당신이 바로 그 언제쯤이오. 남일당 바람 소리

쉿, 여기 사람이 죽었다.

미래의 바람 소리 쉿,

여기 의로운 사람들이 죽었다. 쉿, 그 소리,

사람들에게 정말 들릴 것이오. 정말 널리 널리

퍼질 것이오. 가시오. 이제

편히 가시오. 이별의 물리 혹은 천문학이 아무리 슬프더라도.

가셔야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당신은 갔습니다.

 

 


 

 

김정환 시인 / 휴식노래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생계비 키를 넘고 임금은 오르지 않는

노동자들의 밤

밤은 언제나 술렁거리고

뼈가 시린 추운 날씨 솟구치는 고향생각

쉴 새 없는 기아수출 야간작업 특별잔업

하여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백열등 밑에서 헝겊더미 속에서

힘을 내라 흥부야 착한 흥부야

노동자들의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재봉틀에 손마디 문드러지는 달밝은 밤

졸림과 절망과 깜깜함의 밤이 지나면

피흘려 싸우는 나라, 태양의 세상이 온다

그때는 눈부신 노동으로 온다

그때는 우리 그 착한 눈물과 땀과 피

그 황홀한 얼룩짐 밟으며 온다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집채만한 파도처럼, 산더미만한 해일처럼

 

 


 

 

김정환 시인 / 그러나 사랑한다고 했다

-한강 1

 

 

꽃 한 송이를 피우기보담은

종일 한강에 나가서

한강이 한강인 채로 한강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보이는

황홀히 부활하는 순간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종일 보고 있으면 한강은 내 앞에서

노을에 발그레 상기된 고백의 몸짓으로 자기는

반포 아파트의 화려한 고층빌딩을 비추는 화장 짙은 강 표면이나

제3한강교 밑으로 흐르는

세월의 배 지나간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바로 내 발끝 앞에서 바삐 흐르는 강물은 나를 보고

나는 강물을 보고

나는 흐르며 잠시 눈물 반짝이는 강물에게 나도

그대가 생각해주는 만큼 순진한 놈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이 앞에서

모든 흘러감은 운동에 속하지 않는다.

모든 생활의 때는 타락에 속하지 않는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도회지 깊은 밤, 쾌락과 배설의 찌꺼기, 껍질, 똥, 오줌,

담배꽁초, 껌종이가 흐르고

모든 버려지고 업수임 받고 가라앉는 것들의 슬픔은 강으로 흐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로 종일을 서 있으면

슬픔은 신비스럽게 오래된 아픔의 무게가 되어 고이고

움직이지 않고 처연한 강 중심의 바깥에서부터

물결은 철썩, 철썩여대면서

한강은 고요하지만 거대한 몸부림, 용트림의 털끝, 가장자리쯤에서

조금씩 조금씩 구역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사랑하는 사이로

무끄러워함과 배앝아냄은 아주 귀한 운동이다.

물결은 배신을 배앝아내고 오염된 생선을 배앝아내고

혼인빙자 간음의 씨앗을, 네 발 달린 사산아의 두개골을 배앝아낸다.

 

그리고 흐르는 강과 생활에 바쁜 내가 사랑하는 사이로

그렇게 오래오래 서 있으면

강물은 점점 얕아지면서

 

익사한 비명소리는 점점 높아지면서

그러나 아아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강바닥의, 흙가슴의, 그리움의 온기가 느껴지고

웅덩이는 군데군데 모여서

네게 줄 것은 내가 견뎌온, 내게 남은 것은

몽땅 그대에게 드릴

아픔이 남겨준 아름다움뿐이라고 한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보담은

늙고 찌든 젖가슴에 봄비 촉촉히 적시는

아주 오래된 위안을 구하러 온 나에게

강물은, 저는

업수이 여겨보는 것처럼, 얕은 흐름의 동요이거나

아니면 달빛 반짝이는 물 표면의 정지가 아니라

어떤 아픈 전설 같은, 그러나 아주 생생한

기억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한다.

 

일사후퇴, 동학당 시절보다도 아주 먼

그러나 아직도 서로 사랑하는사이로.

 

 


 

김정환(金正煥) 시인

1954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80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강변 동내에서〉 등이 추천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해방 서시〉,〈유채꽃밭〉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황색예수》,《지울 수 없는 노래》,《좋은 꽃》 등. 2007년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으로 제9회 백석문학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제8회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만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