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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근배 시인 / 송광사에 와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3.
이근배 시인 / 송광사에 와서

이근배 시인 / 송광사에 와서

 

 

아직도 흐르고 있느냐

조계산이 온 몸으로 끌어 안던

밤이 살 냄새를 다 씻지 못하고

물소리는 저데로 치닫고만 있느냐

피가 비칠세랴

뼈가 드러날세랴

사랑은 숨죽여 안개속에 묻히더니

그 입덧은 자꾸 기어나와

국사전 뒷뜰에 부스럼같은

상사화로 피어 있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름이야 열번 백번

바뀐들 어떠랴

산에 오면 나도

산이 되어야 할텐데

감로탑 앞에 서면 나도

머리깍은 돌이 되어야 할텐데

왜 내겐 물소리 뿐이지

 

저 삐죽삐죽한 상사화들이

내 잃어버린 사랑으로 보이지

왜 나는 물소리가 되지 못하지

헛것들에 갇혀서

돌아오는 길을 잃고 있지

 

 


 

 

이근배 시인 / 냉이꽃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思想)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思想家)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平生)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幼年)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그 여리운 풀은

 

 


 

 

이근배 시인 / 살다가 보면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이근배 시인 / 부작란(不作蘭)

-벼루 읽기

 

 

다시 대정(大靜)에 가서 추사를 배우고 싶다

아홉 해 유배살이 벼루를 바닥내던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그 먹빛에 젖고 싶다

 

획 하나 읽는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

세한도(歲寒圖) 지지 않는 슬픔 그도 새겨 헤아리며

 

시간도 스무 해쯤 파지(破紙)를 내다보면

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 찾아질까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까

 

 


 

 

이근배 시인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

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

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

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별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반짝이고

홀로 깨어 있는 섬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

내리는 까닭을 안다.

- 제3회 시와시학 작품상 수상시집 중-

 

 


 

 

이근배 시인 / 자화상

 

 

너는 장학사張學士의 외손자요

이학자李學者의 손자라

머리맡에 얘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

할머니 안동김씨는

애비,에미 품에서 떼어다 키우는

똥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주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와

스승 면암勉庵의 뒤를 이어

조선 유림을 이끌던 장후재張厚載학사의

셋째 딸로 시집와서

지아비 옥바라지에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겨우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아버지는

한 해 남짓 뒤에 삼팔선이 터져

바삐 떠난 후 오늘토록 소식이 끊겨있다

애비 닮지 말고 사람 좀 되라고

비례물시非禮勿視하며

비례물청非禮勿聽하며

비례물언非禮勿言하며

비례물동非禮勿動하며......

율곡栗谷의「격몽요결擊蒙要訣」을

할아버지는 읽히셨으나

나는 예아닌 것만 보고

예 아닌 것만 듣고

예 아닌 것만 말하고

예 아닌 짓거리만 하며 살아왔다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붓을 잡을 줄 모르면서

지가 무슨 연벽묵치硯癖墨癡라고

벼루돌의 먹때를 씻는 일 따위에나

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자다가도 문득 깨우고

길을 가다가도 울컥 치솟는 것은

―저 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그 꾸지람

당신은 속 썩이는 큰아들이 미우셨겠지만

―아니지요 저는 애비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거든요

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을

끝내 따르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는다

 

 


 

 

이근배 시인 / 어미 호랑이, 사랑 주네

 

 

어여뻐라

구름을 뚫고 하늘에 치솟아

뜨는 해 받치고 선 소나무 아래

갓 난 두 아기 데리고 나와

젖을 물리는 흰빛 어미호랑이

저 사랑 어린 눈빛 좀 봐

누가 산 임금 아니래

고구려 옛 무덤 속에서도

동쪽에 청룡(靑龍)서쪽에 백호(白虎)

나라 지켜주는 수문장이 되고

사람 해치는 바람,물,불 쫓아내는

누가 산신령님 아니래

우리네 할매 할아배와 맞담배 태우고

옛날이야기 주고받으며

어미 없는 아기 젖을 빨려주던

백두대간은 호랑이의 나라

금강인가 설악인가

산속의 임금나무 소나무 아래

얼굴 돌리고 긴 꼬리 드리운

우리네 어머니 같은 흰빛 호랑이

옥빛 백자 붓꽂이에 오래 살아

기쁨이네

행복이네

사랑이네

 

 


 

이근배 시인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호는 사천(沙泉).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1961~64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시조, 동시 등이 당선.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추사를 훔치다』  『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 장편서사시 『한강』, 시조집 『동해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제2회, 제3회 문공부 신인예술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고산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 은관문화훈장 수훈. 『한국문학』 발행인 겸 주간, 한국시조시인협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