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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인 / 사랑의 노래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박재삼 시인 / 나무 그늘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박재삼 시인 /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박재삼 시인 / 산에 가면
산에 가면 우거진 나무와 풀의 후덥지근한 냄새,
혼령도 눈도 코도 없는 것의 흙냄새까지 서린 아, 여기다, 하고 눕고 싶은 목숨의 골짜기 냄새,
한 동안을 거기서 내 몸을 쉬다가 오면 쉬던 그때는 없던 내 정신이 비로소 풀빛을 띠면서 나뭇잎 반짝어림을 띠면서, 내 몸 전체에서 정신의 그릇을 넘는 후덥지근한 냄새를 내게 한다
박재삼 시인 / 가난의 골목에서는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오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이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 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박재삼 시인 / 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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