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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서완 시인 / 흰 그림자의 내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3.
강서완 시인 / 흰 그림자의 내부

강서완 시인 / 흰 그림자의 내부

어미 소의 궁에서 갓 밀어낸 송아지

와락 빛을 감지한 엷은 눈꺼풀

신생아의 목청으로 목련꽃은 피어났을 것이다

빛을 찰랑이는 새들의 부리에서 풀려나오는 금빛곡률

그러나 묘한 바람이 허리를 감고

앙금 같은 불안이 꽃잎을 흔들었을 것이다

           이 바람을 걸어야 하나요

           여기는 기억인가요, 현상인가요

누대의 그림자를 지키고 넓혀온

한 잎 한 잎의 흰 나비들

            출렁이는 흰 그림자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태연히 목련궁으로 빨려 들어간 푸른 바람이었을 것이다

 

 


 

 

강서완 시인 / 도플갱어

 

 

 달빛 아래

 잠든 손

 

 산맥을 접고 호수를 타고 온 바람이 만돌린을 스친다

 

 동백꽃이 툭툭 떨어진다 기염을 토하던 초록색도 엎어졌다 한밤엔 늑대가 왔다 절벽 끝에서 하늘도 목을 늘였다 허공이 끈적거린다

 

 바람의 근간이 휘발된다

 목이 긴 물병 속으로 달빛이 휘어진다

 기립할 수 없는 아침

 

 물의 무늬가 깊어졌다

 근육이 생긴다

 

 저 곡선을 읽으려고 그는 한 생을 소진했나?

 

 누군가 눈썹 위에 다녀갔다

 손등에 젖은 기시감이 날아간다

 햇살이 손을 당긴다

 주변 무한대가 일어선다

 

 


 

 

강서완 시인 / 안개, 온몸에 비가 내립니다

 

 

 서랍 속에 들어갑니다 서랍 속에도 비가 내립니다

 

 페가수스의 수원水源에 서식한 불안이 웅크립니다

 

 그가 꽂아 두고 간 기억엔 천 개의 서랍이 있고 천 개의 서랍마다 별이 피었습니다

 

 별 속엔 악보의 감정 사이로 몇 광년의 바람이 지나갑니다 음표가 움튼 호수와 나무, 찬란한 날개와 휘날린 색깔들을 어찌할까요? 겨울의 음폭과 물결치는 남쪽은 또 어찌할까요?

 

 서랍 속에서 잠이 듭니다 천 개의 서랍 속에 비가 내립니다

 

 젖은 달빛 속으로 눈 먼 문자들이 날아듭니다 푸른 비린내가 발등에 하얗습니다 붉은 탱고 흔들리는 심장에서 목이 긴 새 한 마리 파닥입니다 그림자 없는 귀에 붕대를 감습니다 목 없는 음표들이 명치를 휘돕니다

 

 밤새 자작나무 이마에서 고열을 나르던 손이 아침을 깨웁니다 천 개의 풍경에 초록이 돋았습니다 이끼 낀 바람이 말갛습니다

 

 지지 않는 그늘이 서랍 속에 삽니다

 

 천 개의 서랍 속에 날마다 별빛이 맺힙니다

 

 


 

 

강서완 시인 / 소혹성 327호

-술꾼의 별

 

 

술병이 넘어진다

보는 눈이 많을수록

수취(羞恥)가 번진다

 

바람이 불고

보는 눈이 있거나 없거나

술병이 넘어진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수치가 넘어지고

빈병이 쌓인다

 

넘치는 무게로 비틀리는 입술들 흔들리는 사물들

점 점 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환상들

 

수취(羞恥)는 몽롱하지 비틀린 입술에서 노을이 쏟아지지

 

수치가 술병을 부르고

술병이 수치를 놓지 못하는

 

오랜 시소 끝에 술병은 생각했지 '잔을 창조하자'

서녘에 엎질러진 노을만큼 취기를 흘리자

덜어 낸 무게로 어둠을 건너자

 

술잔에 국경이 생겼지

술병 속 광기절망탐욕공포나약늑대쥐뱀전갈여우……

잔의 숨은 구멍 속으로 검은 노을이 흘러 들어가지

 

눈감고도 넘치지 않는 수치(羞恥)

 

신의 연주가 끝나는 저녁

한 무더기 빈병 속 노을은 몇 평쯤 될까

 

 


 

 

강서완 시인 / 발굴하는 기호,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의 본적은 허공

보이지 않는 시그널을 캐는 방식이다

 

허공을 떠도는 우주의 파편처럼

이름이 마비된 군중 속의 섬,

 

저울을 뭉개버린 통증에서 빛과 어둠은 생성된다

 

수억만 년의 허공을 여닫는

안의 빛을 감지한 거미,

용광로 깊이 덧입은 화상으로

발굴한 원석을 세공한다

 

1캐럿의 빛을 위하여 1500톤의 바람을 거르고

250톤의 이슬을 캐는 일,

 

빛의 경도는 통증의 깊이.

관념을 여과하는 물방울 속 수많은 벼랑

첩첩 겹을 샌딩한

골수에서 빛이 돋아난다

깃털 달린 음표의 리듬으로

 

영롱한 이슬을 펼쳐 든 58개의 허공무늬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사물과 대상과 관계 사이

사월의 꽃처럼 허망한

상시(Sancy) 리전트(Regent) 블루호프(Blue hope) 피렌체(Florentine),

빛방울로 넘어진 아라크네의 배꼽엔

신의 눈물이 뿌린 달빛이 햇빛이 고여 있다

 

영원은 스스로의 심지에 돋은 빛,

다이아를 안에 품은 거미를 스치는 밤

 

크리스털 소리를 들은 듯도 한 고요 속으로

어둠이 가만히 얇아진다

 

*가장 우수한 58개 면의 파이어를 가진 다이아몬드

 

 


 

 

강서완 시인 / 연탄

 

 

어떤 생들은 처음부터 검다

검은 생에서 붉은 심장을 찾는

미로의 길목

 

구산 시영아파트 5층

벙어리 사내와 사랑을 나누던

뇌성마비 여자의 날 선 비명에

119는 알몸의 사내를 끌어냈다

우우, 허우적대는 사내의 두 눈에 맺힌 별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거품 문 여자의 입이 비튼 허공을

사람들은 해독하지 못했다

어둑발에 경찰서에 들어선 여자의 엄마가

연인 사이라고 해명했다

 

어둔 통로에서 만난 그들은

위 아래로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마추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은 꽃

어느새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강서완 시인 / 기호는 진화하고 있다

 

 

사과가 옷을 벗었다

 

흰 테이블보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사과는

사유하는 새.

 

본질을 파는 둥근 생각

인습을 떠난 날개가 빛을 출렁인다

 

뜨거운 수프단지 곁 흰 접시의 사과와 양파 옆 오렌지빛을 뒹구는사과*

 

옆모습의 밀도가 흔들리는군요

선택장애의 정면이 빨간 말을 한다

 

추락한 사과는 진화하고 소멸한 사과는 환생한다

평면 너머를 조립하는

 

한 화폭의 산모 천 번의 진통

지(地)의 통증 천(天)의 무늬

 

춤추며 깊어지는 색, 환복을 거듭하는 새

 

휘발하고 휘발해도 날아오르는 채워도 채워도 목마른

결핍은 상상의 무기,

 

파르스름 붉은, 레몬빛 깃털이 출렁인다

 

변주되는 실존들,

향 짙은 노을빛이 어둠을 읽어간다

 

본질이 새를 날갯짓한다

 

*Paul Cezanne의 「사과와 오렌지」 변용.

 

 


 

​강서완 시인

1958년 경기도 안성 출생.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2008년 《애지》신인상에 〈달의 내력〉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서랍마다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