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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 시인 / 작아지는 빈터
저녁을 펼쳐 너를 안개로 만드는 그 밤 너는 돌아가고 나는 떠날 골목을 찾는다 몇 개의 의자를 뛰어넘어 창문을 열고 너의 얼굴을 멀리 던지던 그 밤
어두워지는 바닥이고 강물이고 부풀던 비밀의 햇살 너는 가고 너를 보는 거울이 얼굴에 휘장을 치고 몸을 돌려 어제부터 공중에 떠 있다
누군가 나를 스캔하는 너라는 비밀 너는 자꾸만 지워지고
저녁이 다시 오고 나는 늙어가는 기둥이 되고 화면은 사라지고 여러 겹의 벽이 녹아내린다 너를 안고 돌던 뿌리는 사라지고
출렁인다 달빛이 되는 강물, 수면에서 너는 바닥으로 빛나고 안과 밖이 하나로 모여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네가 돌아갈 저녁이 빠르게 오고 있다 내 안이 더 낯설어지고
-유고시집 『나의 오늘』에서
이덕주 시인 / 나의 오늘
오늘을 흔든다 너는 어깨를 내 앞에 세운 너는 너는 어디에서 잡을까
압핀을 누르고 이마를 타고 불면을 끌고 천정을 본다 너는 얼굴이 없다
손은 벽을 타고 벽과 벽 사이 너의 오늘을 건넌다 어디에 너를 눕힐까 거울에 넣고 불면이 너의 얼굴을 흔든다 오늘은 오늘을
불면을 출렁거리는 거울이 너의 잠을 접는다 너의 꿈을 너에게 던진다 오늘의 등을 끌어당겨
불면을 잡는다 날아다니는 땀방울이다 오늘은 불면이다 거울은 커지고 나에게 오는
나는 밀려가고 밀려온다 겹쳐진 꿈속 오늘이 웃는다 불면을 껴안는다 오늘의 방에서
-유고시집 『나의 오늘』에서
이덕주 시인 / 드론을 타고 간다 1. “아버지 언제부터 이곳에 계셨어요?” 서울역 지하철에서 만난 아버지 빙긋이 웃기만 하신다 아버지는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만 보여 주신다 돌아서 가는 아버지 잠깐 사이 나는 그동안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들여다본다 “아버지, 함께 집에 가셔야지요.” 2. 손가락 사이로 날개가 솟아오른다 눈이 불꽃을 뿜어낸다 손가락이 날아오른다 뿔이 돋아난 머리, 좌판을 내려 보며 계곡을 파고드는 긴 계곡을 벗어나기 위한 에어쇼 날개소리가 먼 곳으로 간다 꼬리를 흔들며 계곡을 돌아 들판으로 간다 3. 영상이 꼬리를 남기고 있다 스크린에 심장박동을 보여주는 낯선 사람 시계가 된 휴대용 초음파 기기 잠깐 사이 내 안경 안으로 알람 메시지가 먼저 내 앞, 나를 기다린다 내가 없는 거리, 나는 날개를 만들고 있다 낯익은 사람이 되고 있다
이덕주 시인 / 드로잉
너를 그린다 그린다 갈 곳을 찾지 못해 강물 위에 서있는 비행기는 그림자를 강물 위에 보여주고 보이지 않는다
연기는 너의 얼굴을 보여주고 어제의 색연필이 품어내는 안개 속의 너를 꺼내지 못한다 잡은 손이 흔들리고
실크스크린에 새겨진 너의 눈이 출렁인다 내일로 가는 패턴, 돌아서며 너의 눈은 눈을 감는다
그릴 수 없는 손가락에 시바스 리갈을 잡아 병째 뿌린다 토마토를 그리다가 키위를 그린다 키위가 사과를 품는다
너의 눈이 나를 보고 항로를 잃어버린 비행기는 제 그림자를 찾고
너를 그린다 그린다 그림이 사라진 한 폭의 피레네의 성* 너는 보이지 않는다
* 피레네의 성; 1959년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대표 작품.
이덕주 시인 / 창문 열고 어둠이 날아간다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른다 솔직히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열린 창문이 어둠을 빨아들인다 오늘 오는 어둠이다 새로운 얼굴이다 어제의 어둠은 보이지 않고 따뜻한 어둠으로 온다 햇살을 움켜쥐고 뿌리치는 어둠이 아침을 데려올 때처럼 잠에서 깬 어둠 그 어둠이 이름을 부른다 순간이 사라진다 이름 없는 어둠이 남아 있을까? 흘러가는 아침이다 아니다아니다 고개 저어대며 어둠이 온다 어제 흘러가던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여기저기 흘러가는 내가 솔직히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힐끗 나를 보는 어둠, 어둠이 흘러간다나 저 어둠 따라 흘러가는 순간 내가 어둠이 된다 어둠이 내 안에 남아 있을까?
이덕주 시인 / 방문 작정은 사라지고 작정은 무서워지고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는 얼굴들 누가 저 설교 듣는지 나무를 잡고 고백하는 것 같다 얼굴 맞대고 시계를 보는 얼굴 손가락을 두드린다 가방이 어깨를 세운다 두렵다 명령이 작정 위로 두꺼운 가방이 따라다닌다 작정이 온다 몇 명의 너를 찾는다 사라진 통로를 찾으러 비탈을 오른다 채널을 돌려 일치하며 서 있다 계단이 인기척을 당긴다 창문을 열고 머물고 있을까 바깥이 인사를 한다 건물 안 안간힘으로 바깥을 끌어안고 어느 외길을 통과하는지 처음의 통로를 찾아다닌다 방문객이 혼자 서서 혼자 찾아온 몸 안의 사막을 모퉁이 걸린 등불은 뜨거워지고
이덕주 시인 / 분리 없는 겨를
너를 받드는 눈동자다 너를 향한 서치라이트는 하루의 불빛을 끌어안는다
먼 곳에서 오버랩 되는 너의 혀끝으로 너의 껍질을 깰 수 있을까
너의 얼굴이다 페달을 밟을수록 멀어지는 부서지지 않는, 언젠가 떠나야 한다
고개 숙인 너를, 가까이 있는 너를 보도블록에 날개를 접는 너를
8월은 꽃 피우며 흔들린다
어느 페이지에 접속해 두었을까 떠오르지 않는 너의 8월은
돌아오지 않는 발자국처럼 보이지 않는 필름이다 다시 켜지는
작아지는 너의 얼굴이 어둠 속 너에게 닿는다 울음을 닫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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