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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존 시인 / 안락한 변화
아침마다 뾰족 구두가 계단에 긁힌다 도심을 꿰뚫어 올릴 듯 도로가 머리 위에서 달린다 내려야 할 곳 지나칠 때면 펼쳐진 책이 글러브처럼 공기를 낚아챈다 다시 회전문을 밀치고 계단을 내려선다 그 사이 폭설이 내렸고 산수유나무 꽃망울을 터뜨렸고 구두코에 빗금이 늘어났다 보도블록으로 어둠이 배어든다 불빛 속으로 숨어들고 싶어 여러 얼굴 떠올린다 만나지 않은 사람, 이미 어제의 반듯한 코를 세웠고 나누지 않은 얘기 한쪽 귀만 떼어 갔다. 주머니 속 눈알만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향한다 배치를 바꿔 볼까, 오랫동안 서 있던 접이식 책상의 무릎을 꺾어 의자 대신 방석을 놓는다 얼룩진 벽지 위에 피카비아의 카코딜 눈을 붙여 놓는다 주머니 속 한쪽 눈알을 꺼내 붙여 놓는다 책꽂이와 침대의 위치도 바꿔 본다 일테면, 그 사이 폭설도 없었고 산수유나무 내내 마른가지를 늘어뜨렸고 구두코는 말장했다 탁상 달력은 열두 장을 돌아 처음 그 자리다 나는 다만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고 무언가 저지르고 싶은 일은 아무 일 없어 정말 다행이고
*카코딜 눈: 커다란 캔버스에 서명-말장난 낙서 경구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위에 그린 눈 한 개가 정신없는 관람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이해존 시인 / 녹번동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2013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해존 시인 / 프린팅 빌리지
창가 물웅덩이 천장에 물그림자 새긴다 일렁이는 무늬는 태양이 목을 축이는 숨결이다 수천 줄기 노란 실버들처럼 흘러내린 전깃줄 책상으로 불빛을 뿜어올린다 전지(全에 번진 잉크처럼 비구름이 떠있다 콘크리트가 사방으로 자라날 때 이곳은 침몰중이다 평평한 이마를 빗댄 처마들 끓어오르는 기계음과 진동으로 어깨를 들썩인다 기왓장 다독이며 뛰어내리는 빗줄기에 엉킨 참새 한 마리 솟아오른다 날갯짓을 따라가던 시선이 빗줄기에 갇힌다 사이안 마젠타 옐로 블랙 블랙 블랙 담뱃불처럼 글자색으로 어두워지는 거리들 인쇄소의 달궈진 열기를 들이마시는 실외기들 프로펠러가 빗방울 튕겨내며 뿌리를 조금씩 들어올린다 물기 머금은 지붕이 비늘처럼 번들거릴 때 빗줄기 휘감은 기왓장들 승천하려는 듯 들썩인다 좁은 철제 계단을 오른다 모니터 앞에서 한 장의 꿈을 배열하는 도안가 긴 손마디가 마우스 패드 위에서 빗금이 거미줄을 친다 아직 인화되지 않은 꿈들을 펼쳐본다 잉크들로 어두워진 문을 밀치면 쌓였던 기계음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깨알 같은 활자의 독경소리 기계음에 갇힌 인쇄공이 묵묵히 먹물 번진 파지를 골라낸다 밤새 품었던 모니터 속 꿈들이 부화한다
이해존 시인 / 데칼코마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 현실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배역 없는 아이가 죽어간다 방금 전까지 함께 뛰놀았어요, 귓불까지 먼지를 뒤집어쓴 동생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얼굴을 갈퀴손으로 감싸 안는다
폭격기 소리가 쏟아진다 섬광이 번쩍이고 순식간에 드러난 얼굴들
폐허 속 임시 병동으로 죽은 아이가 실려온다 들것에 웅크린 모습 그대로 찍혀 있는 핏자국
바닥의 핏방울을 발자국이 쓸고간다 막을 내린 스크린처럼 하얀 천이 아이의 얼굴을 덮는다
떠나지 않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 믿는 마지막 증언 과녁으로 남은 알레포*
아랍의 봄은 지나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지하 벙커의 문이 열린다
* 다큐 <사마에게>에서 등장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리아의 도시.
-《모든시> 2020. 봄호
이해존 시인 / 유목의 방
푸른 장막으로 둘러쳐진 둥근 방, 바람의 발톱이 장막을 찍어 흔들어댈수록 방안은 낮고 아득하게 가라앉는다 고비사막 넘어온 모래바람이 투명한 비닐 창에 붉은 얼룩으로 흘러내린다 울란바토르 외곽의 게르가 옥상에 세워졌다 그가 가죽부대에 담긴 마유주를 건넨다 이 밤이 지나면 그는 새로운 목초지로 떠날 것이다 별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밤의 푸른 정맥을 긋는 날이다 두려우면 하지 말고 했으면 두려워 마라* 멀리 모래 바람이 사나운 말처럼 갈기를 세우고 있다 말고삐 당기던 초원이 점점 멀어져가고 펄럭이는 장막은 두 평의 하늘로 어두워진다 양떼 같은 가족의 눈망울을 사이에 두고 엎드려 잠든 몽골 사내 한쪽 어깨가 끝끝내 중심을 버틴다 고시원 휴게실이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 몽골 속담.
이해존 시인 / 매트 카펫 위 실내화에 발을 집어넣고 침대에서 내려선다 밖에 나갈 때 둘둘 말아 어디든 내려놓으면 한 자리가 된다 진흙이 묻어 있어도 깔아 놓으면 펼쳐 있어서 깨끗해지고 모서리에 자리잡은 책장 대신 옮겨다닐 것이 필요하다 펼쳐 놓아야 시작되는 운동 발끝으로 매트를 끌어모은다 푹신한 만큼 허방을 짚는 잔디밭이 들어올렸다 꺼진다 한 발은 매트에 걸치고 결심을 지연시키는 모서리가 돌돌 말린다 매트리스 위에 매트를 푹신한 의자 위에 방석을 운동을 위해 준비 운동을 양손을 갖추고 무언가 시작하기 전 자꾸 손을 비빈다 갖출수록 부족해지고 나는 나를 준비할 게 많아진다 -계간 『시인수첩』 (2022년 봄호)
이해존 시인 / 간질에 대한 오해
이건 병이 아니고 단지 증상일 뿐이라고? 오래된 증상이 그 사람의 모양을 만들기도 하지 떨림의 징후가 감지되는 순간 두드러기처럼 온몸에 퍼져 나가는 뻣뻣함을 봐 떨림은 은유가 아니고 병이라고 나 아닌 누군가 내 몸을 붙들고 있는 걸까 죽은 영혼을 몸에 싣는 영매도 이물감에 몸서리치잖아 아무렴, 황홀경 속에 뒤바뀌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야 봐, 바로 눈앞 술잔이 용수철 장난감처럼 출렁이잖아 몸속 기억을 모두 펼쳐봐 그 속에 나 아닌 많은 눈동자가 있다면 그건 이미 잘려진 기억일 거야 뼈마디를 자근자근 재워놓는 술에 취한다면 떨림을 잦아들게 할 수는 있지 한꺼번에 취할 수 있는 알약은 왜 없는 걸까 긴장하지 말라고? 마음보다 병이 저만치 앞서 있어 속수무책이야 봐, 바람도 없는데 이유 없이 머리카락이 흔들리잖아 떨리는 약포지가 놓쳐버린 프라놀 한 알, 동전처럼 구르다 모서리에 숨어버렸어 놀란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지 공복에 집어삼킨 프라놀과 리보트릴* 동전처럼 짤랑거리며 몸속 깊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항진전제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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