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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찬 시인 / 시 캐는 농부
잿빛 소음 가득한 도심의 한복판에서 다 된 밥그릇 받아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귀향 겨울 볕 바르고 바람 얌전히 쉬어가는 봉화산 자락에 터 잡은 지 9년 멧돼지처럼 산전과 산비탈에 엎드려 내 살 긁듯 벅벅 긁을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더기들 육근(六根)으로 발기시켜 수박씨 뱉듯 퉤퉤 뱉는다 밤, 대추, 고야, 머루, 두릅, 엄나무…… 생에 얽힌 사연들 시마(詩魔)에 걸려 깜깜하게 언 땅 쨍쨍 풀리는 줄도 모르는 삼월이, 불쑥 찾아와 살갑게 달라붙어 일일일야(一日一夜)만이라도 동주하자고 강짜 부리는 네모나고 뾰족하고 맵고 쓰고 시고 짠 놈들, 끌어안은 팔만사천 톤의 감각 육경(六境)으로 버무려 시를 짓는다 문 밖 헛기침 소리 고요에 들고 댓돌에 걸터앉아 푸르게 출렁이는 달빛과 어우러진 그림자들의 맥박 소리로 지지는 된장찌개 보글보글 뿜어내는 시의 향기 쿵쾅쿵쾅 내 심장 뛰듯 바람 박차고 팔라당팔라당 여행을 떠난다
안원찬 시인 / 그리다
우물 속 달빛 푸르다
실오라기 같은 달빛 베고 잠든 은사시나무
빛줄기 같은 산들바람 스치자
나뭇가지 잠재우던 이파리들 모로 누워 꽃을 피운다
소풍 온 별들 재잘재잘 이야기 한창이고
바람개비 찾아와서 쏙독쏙독 새벽을 울어댄다
여울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 떼의 등 비늘처럼
반짝반짝 어둠 켜던 풀벌레 울음들
안원찬 시인 / 낮술은 너무 슬퍼서 목화송이 같은 미소 무럭무럭 쏟아붓는, 고양이가 번개 치듯 눈송이 잡으려 소리 없이 버럭 눈 찢게 하는, 거기에다 오똘랑오똘랑 허고 찢어대는 누렁이에게 하이얀 숄 포근히 감싸주는, 산수유꽃 불두덩에도 살포시 내려앉아 새하얗게 웃어주는, 모닥불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는, 봄과 봄의 바 뼘 사이에서 낮술은 너무 슬프다
안원찬 시인 / 문턱
텅 빈 봉화산 자식들 죄다 사문(死門) 너머로 출가시키고 바람에 매 맞던 육식(六識) 안으로 불러들여 묵언 중이다 마지막 달력 한 장 눈에 넣고 밀려간 물결의 흔적 헤아린다 덫에서 벗어난 바깥 춘분이다
안원찬 시인 / 달맞이꽃은 아침을 두려워하고
오래전, 벌건 대낮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을 겁니다 벌 나비 햇살 끌고 와 바람 넣어도 얼굴만큼은 보여줄 수 없다고 절절 흔들어댈 겁니다 태양이 머리통 지글지글 달궈도 장대비가 사정없이 온몸 후려갈겨도 칭찬하는 바람 욕하는 바람 제멋대로 불어도 무럭무럭 동요되지 않을 겁니다 그저 묵묵히 몸만 지탱하다가 저녁노을 끌어 덮은 겨드랑이에서 노랑나비 같은 노오란 꽃 팍팍 피워댈 겁니다 지나는 구름들에게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 외롭다 무섭다 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아픔 없이 피운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꽃이란 또 얼마나 슬픈 벼랑입니까 절망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 두려움 가슴에 안고 잠 꼿꼿이 세운 채 기다리는 노란빛 숨결로 달님과 정겹다가도 날 새면 꼼짝없이 그리움에 묶여버린다는 것을
안원찬 시인 / 폐교 -강후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삐약거리던 노란 병아리들 모두 떠났는가? 덩그런 운동장 모퉁이 향나무 옆 이승복 어린이 동상 홀로 울고 있다 “나는 외로워서 싫어요”
텅 빈 교정 돌아보니 용머리는 아직도 쓸만하고 이십삼 년 전 풍경 몰라보게 흐트러졌어도 사각 창틀 안 교실에는 병아리들 발자국 흐릿하게 남아있고 낙서 자국 자욱하다
들고양이들 서성대는 교무실 앞을 지나 긴 복도를 지나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버렸을 담임선생님 창가 타고 오르던 나팔꽃 따라 아직도 풍금을 켜고 계실까
행여 다칠세라 병아리떼 쫓던 어미 닭들도 모두 떠났을까 알아볼 수 없게 커버린 나무들만 덧없는 나이테를 헤아리며 빛바랜 사진처럼 서 있다
*강화도 하점면 소재
안원찬 시인 / 녹차
한 생 불심으로 구워낸 이당의 찻잔에 아침 혀가 젖는다
청청한 지리산의 산들바람 입안에 고요하다 하동에서 제 고집으로 자란 녹차
입안에서 한 바퀴 굴려야 제맛 나는, 봄빛 깨는 소리 하늘 높다
오늘의 새로운 발상 요동친다 어젯밤 뒤숭숭하던 꿈자리 별자리 되고
30년 넘게 녹차 마셔온 사람은 적막하다 몸이 다관 되어 차 우려내기도 한다는 것에
《시와표현》 2019. 11,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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