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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훈 시인 / 검은 은화
눈에서 몰려 나간 빛 때문인지 사진에서 떠나간 바람 때문인지 바깥을 잠근 채 혼자를 견딘 꽃이 피어나고 있다 피자마자 흩날리는 바람에게 밀려 까라지고 있다 꽃을 보면서 그가 원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생각하였다 크레파스처럼 출렁거리는 밤의 강을 보면서 그를 위해 어떤 색깔이라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리는 꽃잎의 궤도에서 눈을 떼고 밤하늘을 본다 별은 빛나고 있다 블루에서 다크 레드, 시간에 파리하게 질린 검은 은화의 색깔인 별도 있다
다시 꽃을 바라본다 마구 피어나던 내 속의 여자가 꽃으로 빠져나가 밤하늘에 나부끼고 있다 달빛과 고스트 화이트*가 밤하늘을 적시는 그 잠깐 동안 내 속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여자가 들락거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를 이 봄은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지, 봄밤은 언제쯤 내게 색깔을 돌려줄 것인지, 밤은 허황되고 어두운 블루만 되쏠 뿐 말이 없다
* 헥스표 #F8F8FF, 드러나지 않는 흰색.
임지훈 시인 / 바보
난 바보가 참 좋다 바보를 좋아하다 보니 바보 같단 소리도 듣고 결국, 인생관 또한 바보로 정했다 가끔씩 듣는 바보 같단 소리에 미소를 짓게 되고 미소를 짓게 됨에 따라 내 눈가엔 깊은 주름이 열두 개 있다 바보의 훈장인 셈이다 바보는 남들이 뭐라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 좋고, 바보는 자주 잊어버리고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자주 경이로움에 싸일 수 있어 좋고, 바보는 행하는 몸과 마음에 악 惡이 없어서 좋다 난 이런 바보가 참 좋다 나는 바보다, 바보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022.05.04.
임지훈 시인 / 뚜뚜뚜
그대의 전화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새벽녘에 잠을 청해요. 혹,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닐까 무수한 걱정 속에 부딪히는 갈등도 그대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 있어요.
그대의 전화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뛰고 뛰고 또 뛰고 전화기를 바라보는 내 사랑은 지금도 뚜뚜뚜.
사랑은 이렇게 오는 걸까 마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는 걸까 뚜뚜뚜 하며,
임지훈 시인 / 전갈
1. 가끔 봄비는 소 같다 움직이지 않는 송아지를 발로 밀어 보고 있는 어미 소
2. 초희* 곁엔 봄비처럼 생긴 어둑한 서쪽 연못이 있다 한쪽으로 쏠리는 밤을 감싸 안고 있는 푸른 어둠과 가느다란 목소리를 닮은 부드럽고 한적한 바람이 그녀 정원에 살고 있다 그녀가 설움에 겨울 때 잠깐 기댈 수 있는 작은 병풍이 있다 그녀 후원엔 낮은 담장을 바라보며 살구나무에 얹혀살면서 생각나면 비를 뿌리는 봄밤도 있다
슬픔은 전갈이다
밤이 기르고 있는 전갈은 검은 고양이처럼 시름 속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도 봄밤이 찾아왔다 살구나무와 연못을 거느린 후원이 없어 베란다에서 보이는 놀이터 시소 옆에 연못을 그려 넣었다 베란다 유리, 차가운 살갗에 살구나무를 꽂아두었다 어느 봄밤 살구꽃이 기울어진 시소 옆 마른 연못으로 초희를 찾아가듯 떨어지고 있다 봄비는 고양이처럼 내리고 있다 설움을 막아줄 병풍이 없어 푸른 어둠이 수놓아진 초희의 봄밤을 빌려와 거기에 머릴 기대고 떠나지 않는 그대를 생각하였다
까닭을 모르기에 고양이는 봄비에게 다가갈 수 없고 빗소리로 사라질 수 없어 끝없이 꽃 지는 봄밤인 그대 그대 잔기침처럼 달콤하고 축축한 봄과 밤의 냄새 차가운 봄비가 연못으로 모여들 듯 없는 그대가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푸른 새벽을 툭 깨는 뻐꾹새 소리가 멀리서 들렸고 초희가 연주하던 가느다란 아쟁 음악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3. 누가 내 부츠 속에 초희의 시**를 숨겨두었다 시도 전갈이다 독이 퍼져 벗어나고 있는 나는 봄비처럼 몽롱하고 푸른 어둠을 친친 감은 저 봄밤, 오싹하다
* 허난설헌 본명 ** 허난설헌 시 <봄비>
임지훈 시인 / 레몬 시폰
늘 폭포처럼 쏟아지는 모래,레몬 시폰 속으로, 그 환幻속으로 쓸려 들어가 파묻혀야 잠에 빠져들 수 있다 레몬 시폰은 무게가 없고 향기가 없고 자세히 바라보면 색깔도 점점 희미해져 사라지고 있다
눈을 뜰 수 없었던 사막폭풍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적 있다 폭풍이 지나가길, 길이 다시 드러나길 기다린 적 있다 나는 환幻속을 거닐 만큼 어리석거나 얇은 여자는 아니다 모래폭풍은 살아 있는 오늘처럼 한 가지 색깔로 몰아치고 있다 생애는 뭔가를 내놓아야 할 때가 찾아오고 만다 온몸에 힘을 주고 그 존재에 화인火印으로 지지듯 나를 인식시켜야 할 때가 찾아오고 만다
소유주를 위한 제사, 제祭를 마치면 모래폭풍이 가라앉고 카키가 빛을 머금고 허공에 떠 있다 그때 비로소 잠은 나를 거두어 준다 잠 속에서 카키에서 레몬 시폰으로 나의 색깔이 사막 본래의 건조한 영토를 넓혀가고 있고 나를 봉헌하듯 배꼽 위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색깔엔 본래 주인이 없다
*헥스표#FFFACD, 투명에 가까운 연한 노란색.
-시집 <고래가 나를 벗어나>에서
임지훈 시인 / 코끼리
1. 아무리 모자 속으로 집어넣어도 바깥으로 삐져나와 사람들은 얘기를 하다 내 귀를 발견하면 휘둥그레진 목소리로 귀가 어깨까지 덮어주니 겨울에 얼마나 따뜻한지? 눈을 털어내기는 귀찮지 않는지? 너무 많은 소리가 쏟아져 들어와 마음은 뻐근하진 않는지? 질문이 펄럭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귀를 펼쳐 낙하산처럼 타 본 적 있냐고 물어온 수녀도 있어 사랑처럼 밤하늘에 갑자기 버려져 낙하 속도와 캄캄하고 달콤한 작별 속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때 펄럭거리는 귀가 얼마나 도움이 되냐고 물었어
놀라 하얗게 질린 노인의 쪼그라든 그것 같은 귀를 슬그머니 만지면 금방 팽팽해져 박쥐처럼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어 밤빛으로 팽팽한 어둠의 화살 속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다 하늘이 어두워져 다시 좁아질 때 놀란 새들과 네 창문에 밤새 붙어 있었던 날도 있었어
상상력이 부족한 너는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어 밤을 돌리고 있는 야행성의 눈빛들과 놀고 있는 달빛을 보았어 귀로 온몸을 덮고 새벽의 푸른 독毒을 참으며 네가 일어나 창문을 톡톡 건드려 주길 잠결에 살짝 커튼이라도 열어주길 기다렸어 너는 귀보다 나를 먼저 알아봤기 때문이야
2. 빛이 거리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닐 때 귀로 얼굴을 덮고 자는 척 해 장대비가 멸시하듯 붉어진 도시의 모든 창문에 빗발을 꽂아댈 때 귀를 펼쳐 독수리처럼 날아올라 비에 무너지는 거리의 모퉁이와 불안한 까치걸음을 바라보곤 해 누군가 탱자나무의 바람을 귓속으로 밀어 넣어도 귀를 깃발처럼 펄럭거려 그 바람을 다시 갈라진 도시로 되돌려 보냈어
코로나 후유증으로 마구 자라난 이 귀가 좋아
허리까지 내려온 귀가 처음엔 어색했지만 가슴이 갑자기 텅 빌 때 어깨도 감쌀 수 있고 영혼까지 데워주기에 귀가 점점 좋아지고 있어 동짓날 아무도 모르게 귀를 활짝 펼치고 박쥐처럼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은하수까지 날아간 적도 있어 은하수는 광년의 영역이지만 내 귀로는 하룻밤이면 다녀올 수 있어 그 이유는 알 수 없어 이 귀를 사랑하기에 다른 불편은 잊을 수 있어 언제든 네 밤하늘에서 다크 블루로 펄럭거리며 널 기다릴 수 있어 너무 좋아 마구 자라버린 귀를 사랑하기로 했어
3. 귀가 매일 자라고 있어 끝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코끼리 똥으로 변하 면 어떡할까 걱정이 따라다니지만 금방 잊어버렸어 매일 밤마다 손톱을 다듬듯 가위로 귀를 매만질 것인지 아니면 바람에 귀가 연마되길 바라며 끝없이 날아다닐 것인지 아직 정하진 못 했어 아무래도 끝없이 날아다니는 쪽이 홀가분할 것 같기는 해
4. 숨겨진 코도 밤마다 자라나고 있어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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