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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이랑 시인 / 어느 날, 문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1.
정이랑 시인 / 어느 날, 문득

정이랑 시인 / 어느 날, 문득

 

 

눈을 떠 보니 선인장 하나가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었다, 왜일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도대체 왜?

사람의 곁에서 훌쩍 떠나버린 것일까

무슨 잘못을 내가 저지른 것일까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하는 걸까

며칠 째 답답한 가슴만 움켜잡고 있다

아프면 병원으로 가듯 꽃집을 찾아갔다

“햇볕과 놀게 하셨나요? 물은 주셨습니까?”

이제야 알았다, 나의 무식함 때문임을

나는, 나도 모르게 가해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나에게로 온 이후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 것

선인장에게 물은 주지 않는다는 편견으로

꿋꿋하게 나만 지금껏 잘 살아온 것이다

아아, 이를 어쩌나!

그래, 또 누군가에게 잘못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

가시 없는 말이 그대에게는 비수일 수도 있었겠지

아아, 참 미안하다 그대여!

한동안 선인장 앞에서 성호를 긋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눈을 감아본다

 

 


 

 

정이랑 시인 / 뱀아

 

 

공원의 계단에서 마주쳤다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떡하니 대가릴 쳐들고 있는지

동네 아이들에게 돌팔매질 당하지 않고

땅바닥을 밀고 밀면서 왔을 길,

먼저 떠나가길 기다렸으나

얼어붙은 나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뱀아, 뱀아, 뱀아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고 가거라

어느 혼령을 실어 이승에 온 것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느냐만

나를 보는 너는 필시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가거라, 어서 가거라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자

뱀아, 뱀아, 뱀아

 

 


 

 

정이랑 시인 / 왜 극락조잎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질 못하는가?

 

 

극락조를 바라보다가 알게 되었다

500원을 덜 받은 손님에게 궁시렁 궁시렁,

콩나물비빔밥에 콩나물이 적다고 전화를 걸고,

택배봉투를 받고 맞게 왔는지 확인을 한다

왜 그렇게 사니?

500원을 덜 받으면 어떻고,

콩나물이 적으면 어떻고,

봉투가 100장이 안 되면 또 어떻니?

고개를 숙이고 넓게 마음을 펼친

극락조를 봐라, 극락조 마음을 보아라

사사건건 따져보는 소갈머리,

왜 극락조잎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질 못하는가?

 

 


 

 

정이랑 시인 / 붉은 고추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아

장독대 대소쿠리에 몸을 내맡긴다

햇볕이 눌러대는 시간 속에서

터져나갈 듯 비틀어지는 심장

한때, 구름 사이 끼어들어 바람의 길

확인하고 돌아오는 새를 보며 부지런히

바다 쪽으로 생각을 열어놓던 날도 있었지

지금은 애써 묻고 싶지 않다

마지막 올려다보는 하늘 끝 날아가는

청둥오리떼 어디로 가려 하는지

머리채 흔들며 가로질러 가던 젊은 날의

강물 같은 꿈 이제 누워 잠들거라

흙속 발 담그고 펄떡거리던 나뭇가지들

그 곁에 돌아갈 수 없구나

바람이 누워 있는 풀숲 근처의 쓰르라미 울음소리

희미해지는데, 나의 전부는

먼지처럼 가벼워질 수 없을까

다슬기처럼 달라붙은 밤하늘의 별 헤아릴 때

비로소 나의 온몸은 불덩이로 달아올랐다

 

 


 

 

정이랑 시인 / 아름다운 비상금

 

 

생활비가 모자라서 돈 달라고 하니 남편은,

서재방 어딘가에 백만 원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만 권도 넘는 책들을 뒤져보라는 것인가

얼치기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책 속 백만 원은 자신의 비상금이라고

찾을 수 있으면 내 비상금으로 쓰라고 한다

밤 새워서라도 찾아내고 싶어졌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방

시계 돌아가는 방향에서부터 훑어내려 갔다

먼지투성이 속에 가지런한 책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다가 누렇게 바랬다

입 벌어진 시집 속에서 발견한 건

이십대 여자의 사진 한 장

아름다움은 젊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밀짚모자에 선글라스 끼고 하얀 이를 드러낸 그녀

백만 원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배경으로

멈추어 있는 시간을 보고 있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구나

돈만 있으면 주름도 없애고

눈, 코, 입, 턱까지 고쳐 미인이 되는 세상

남편의 비상금을 찾으려다가

우연히 찾게 된 나의 아름다운 비상금,

시집 속으로 다시 들어가 잠을 청한다

 

 


 

 

정이랑 시인 / 지렁이

 

 

길 위에서 길을 밀고 가는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길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는 중일까

발끝으로 톡 건드려 보았지만

몸을 펼쳐 다시 길을 뽑아내며 간다

사람에게는,

돌아보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부쩍 뒤를 돌아보게 되는 나는,

문득 문득 그의 길이 생각났다

 

 


 

 

정이랑 시인 / 내가 뼈해장국을 다 비우는 시간 동안

 

 

 감자를 심고 나서 뼈해장국 한 그릇을 시켰다 땀 한 되박 쏟아내고 마주앉은 국밥, 그 사이 해외노동자들이 단체로 밀려들어 “뼈둘 탕둘”, “뼈넷 탕둘”, “뼈넷” 북새통의 국밥집, 방금 해외순방을 마친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고, 84세에도 삼천리표 자전거를 타고 약국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가 길 건너 신호등에 서 계신다 이곳 주변 상가에서는 외국인들이 절반 넘는다면서 주인들은 영어도 배우자하고, 날개 하나 빠진 선풍기가 덜덜 떨고 있는 시간에도 뼈와 탕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MZ세대들에게 대세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이라며 동영상을 찍어 올려야 한다고 누군가 열변을 토하고 있고, 아이 둘 낳으면 월세가 무료, 저 출산의 해결 방법이 될까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뼈해장국 한 그릇 비우는 시간 동안, 국밥집에서는 뼈해장국과 갈비탕이 무쇠 가마솥에서 버글버글 끓어 넘치고 있다

 

 


 

정이랑 시인

1969년 경북 의성 출생. 본명 정은희. 1997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청어』. 현재 '사림시', '시원'  동인으로 활동. 한국시인협회 회원. 1997년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의 해「불교문학상」 시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