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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해림 시인 / 네가 온다는 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1.
박해림 시인 / 네가 온다는 말

박해림 시인 / 네가 온다는 말

 

 

네가 내게로 온다는 말은

내가 네게로 간다는 말이다

한 걸음도 빼먹지 않고 온전히

나를 건넌다는 것이다

네게로 닿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접었던 발자국과

우리가 폈던 날개만으로도

 

걸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디에 놓여도 걸음만은 떠내려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박해림 시인 / 실연

 

 

가위가 부러졌다

사랑을 말하던 당신 입이 어긋났다

허리를 꽉 졸라매었던 것은 당신 체온을 탐해서인데

수많은 돌담과 열매와 뿌리를 가진 당신 살을 얻고 싶어서인데

이젠 텅 빈 나의 너

꼼꼼히 숨겨두었으나 엎질러졌으니

등을 꿈꾸었으나 배가 되었으니

배를 꿈꾸었으나

등이 된 나의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다

한 다리로도 걸어갈 수만 있다면

사이와 사이를 가둔 너를 껴안을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건너갈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한낮이었다

 

 


 

 

박해림 시인 / 절반의 그늘

 

 

세상의 절반을 뒷면이라고 부를 때

 

개미와 고양이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 것

가시를 삼킨 꽃은 캄캄한 구름을 밀어올리고

소망을 잃은 씨앗은 결빙하는 것

 

새들이 들락거리던 산수유나무

겨드랑이가 가려울 때 힘껏 날개를 뻗쳐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는 것이다

 

날마다 웃자라는 상가에서 지루한 시간의 잔뼈를 골라내고

 

사거리 횡단보도를 통과하는 산뻐꾸기 먹울음 소리에

발끝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새벽에 떠났던 사람들이 서둘러 돌아올 즈음

사람들이 뛰거나 서 있던 자리에 벌써 풀이 돋고

뒷면이 자란다

 

울음을 덜 그친 아이의 눈물은 발효가 진행 중이다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언덕바지 골목길

게으른 지팡이를 보초로 세우고

싸구려 소파에 기댄 노인

생의 바닥을 훑던 가난한 나뭇가지를 꺼내

머리 위에서 재잘거리는 새들의 겨드랑이를 천천히 긁는다

 

햇빛 문고리가 남은 그늘을 달랑달랑 흔든다

 

 


 

 

박해림 시인 / 어머니

―오래 골목․14

 

 

처음부터 골목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골목이 되어 있었다

 

사실,

골목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다

골목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겁이 났을 뿐이다

깊이 들어가면 길을 잃을 것 같아 겁이 났을 뿐이다

아예 들어가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덧대고 덧댄 길이 점점 낯설어져서

들어서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오래 골목 입구에 서성인 날들

다른 한 발은 차마 들여놓지 못했는데

 

어느 날 싹둑 골목이 베어져 있었다

 

―《시와소금》, 2019년 여름호

 

 


 

 

박해림 시인 / 벚꽃나무의 슬픔

 

 

어느 깃털의 가벼움인가

 

고요의 떨림인가

 

꽉 움켜쥔 손 끝에 떨리는 한 생애

 

떨켜에서 시작된 너의 눈물

 

왜 낯색은 이리도 훤해서 모두들 한숨인가

 

너의 그늘로 모여드는

 

얼굴들 너를 닮고 싶어 환장한다

 

네 눈물 한 장 받아내기에

 

온생을 건다

 

 


 

 

박해림 시인 / 절규

 

 

절굿공이가 힘껏 고추를 빻는다

엇갈린 틈을 들이켰다가 내뱉는다

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검붉은 목마름이

사방으로 튀는

햇빛의 시간을 끌어모았다가

잘게 잘게 바수어버리는 것이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으스러뜨려놓는 것이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아

가루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

절굿공이를 따라

눈이 휙, 올라갔다 쑤욱 내려갔다 하는데

한눈을 팔면 제 몸이 바수어질까

절굿공이를 한순간도 떼어놓지 않고 째려보는 것이다

 

바닥을 내리찧을 때마다

불끈불끈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

뽑히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

눈물 찔끔찔끔 흘려보내며 아닌 척도 해보는 것이다

 

-(열가지 향기의 시 : 等等詩社 詩選集Ⅲ) 인북스, 2021

 

 


 

 

박해림 시인 / 일분 레시피

 

 

 민들레 노란 목젖, 작약 새순 약간, 수선화 입술, 휘파람새 눈물 조금, 산수유 발톱 세 쪽, 황사 약간, 햇빛 넉넉히, 수줍음 5그램 ・・・

 

 먼저 작약 새순은 찬물에 잠깐 담구었다 건진 후, 수선화 암술 수술은 부서지지 않게 부드럽게 살살 흔드세요 단, 산수유 통꽃은 식초에서 떫은맛을 우려내어야 해요 추울 때 가장 먼저 피는 꽃일수록 맵차고 독하거든요

 

 풀밭을 쫙 펴세요 햇빛을 넉넉히 두른 후, 작약 새순을 한꺼번에 넣고 저으세요 눈바람을 골고루 뿌려준 다음 민들레노란 부위와 수선화 암술 수술과 산수유 통꽃을 차례로 집어던지세요 휘파람새 깃털로 마무리하는 것도 잊지말구요

 

 그리움 한 접시 마음 놓고 잡숴 보세요

 

-《바닥경전》, 나무아래서, 2011

 

 


 

박해림 시인

부산에서 출생. 고려대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및 아주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1996년 《시와시학》을 통해 등단, 2001년 《서울신문》과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시집 『실밥을 뜯으며』 『고요, 혹은 떨림』 『눈 녹는 마른 숲에』 『저물 무렵의 詩』 등. 2001년 지용신인문학상, 2008년 이영도문학상신인상, 2010년 청마문학상신인상 수상. 아주대, 호서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