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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희근 시인 / 압천과 서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1.
강희근 시인 / 압천과 서시

강희근 시인 / 압천과 서시

 

교토의 도시샤대학 캠퍼스

나라 잃은 두 사나이의 시비가 있다

 

아시는가,

압천 십리벌에 해는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물 소리

 

지금은 잔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들으시는가,

잎새에 이는 바람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소리

 

지금은 캠퍼스 교양관 창으로 찔리듯

들어오는 햇살에 씻기어

잔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붉은 벽돌 아담한 캠퍼스의 늙은 팽나무

그늘이 그늘을 물고 있다

 

두 사나이의 눈썹이 눈썹을 보고 있다

 

 


 

 

강희근 시인 / 노인밥

 -청락원에 가서

 

 

노인들 속에 끼여서 노인밥을 먹는다

서너 가지 반찬에 게된장국

잘 단련된 내 입에도 숟가락으로 들어와

 

제 밭뙈기 이랑인 양 스며드는구나

 

노인은 입으로부터 오는가

식탁을 사이하고 한끼 에우는 노인들

표정이 등걸에 핀 매화 같다

 

은퇴와 소외와 정년의 그늘

어깨에서 내려놓은 자리 거기, 맞춤 같은 바겐세일 같은

무위의 안락 하나씩 얹어 놓고

서너 가지 반찬에 게된장국이 성찬이다

 

노인들 속에 끼여서 노인밥을 먹는다

정년 한 사람처럼

하루의 스케줄 따로 없는 사람처럼

 

기다려라 노인시설 군데군데 짚어 다니는 사람처럼

어디에나 있는 같은 모양 숟가락 들고

오늘

생애의 물레질, 밥 한끼 에운다

 

 


 

 

강희근 시인 / 그 섬을 주고 싶다

 

그 섬에 그를 데리고 가

그 섬을 주고 싶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섬을 그에게 주고

나는 섬을 그리워하고 싶다

그 섬에 외로이 서 있는 등대도 그에게 주고

등대에 앉아 있는 갈매기도 그에게 주고

나는 다만 등대의 꼭대기에 흐르던 구름

손수건만한 구름이나 뜨다가 바라보고 싶다

그 섬에 동백이 피고 동백이 지고

그 섬에 꽃송이 바람에 굴려 다니는 날

나는 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쓰리라

잠못 이룬 잠들이 다시 깨어나고

흐르던 구름이 멈칫, 멈칫거릴 때

나는 그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그의 이름 앞에

한 통의 편지를 쓰리라

그 섬에 가 닿는 파도를 떠서, 사무치는 가슴의 소리

편지를 쓰리라

 

 


 

 

강희근 시인 / 연필 등대

 

 

통영은 연필 등대로 일기를 쓰고 있다

통영이 걱정하는 것은 당동과 미수동이 달랑

충무교 하나로 애초 혈육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외지에서 통영 보러 오는 사람들

운하라 하며

곡예하듯 충무교 건너다니고

해저터널이라 하며

바다 밑 터널에 들어가 경이의 눈빛

가슴 쓰다듬어 내린다

 

통영은 바다에 끄슬린 햇볕으로

때로는 살빛 거칠지만

손 흔들면 손 아래로 들어오는 터미널이나 강구안

이켠 산이나 저켠 언덕이 사촌처럼 따습고

그 아래 그 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집들이 시집갈 날 받아놓은 처녀처럼

댕기머리 수주웁다

 

제 살 제 생김새 어디로 가겠는가

일기장은 대개 이러하지만

미수동에서 건너다보이는 세월의 어금니, 그 사이로

충렬사와 착량묘 돌계단이 흐르고

그 배경으로 생활의 근육처럼 산복도로가 흐른다

 

통영은 미수동 연필 등대로 일기를 쓰고 있다

등대의 눈 밖에 있는 것들

주도와 가마섬, 곤리도 사량도로 뻗어가는 뱃길

일기에는 톳내음 파래내음 미역내음... 후각을 찌르고

후각은 접속어처럼 단락을 바꾸어 주고 있다

 

-시집 『새벽 통영 (2010)

 

 


 

 

강희근 시인 / 남인수의 노래 듣고 있으면

 

 

가수 남인수

그대 노래소리 듣고 있으면

하늘이 낸 사람 하나

진주 하동촌에서 나왔다 하고

말하게 된다.

 

무슨 무슨 가요제나

전국의 노래자랑 같은 데서

골라낸 가수 아니라

애초에 하늘의 달란트 제 몫으로

타고난 사람 하나 나왔다 하고

말하게 된다.

 

가수 남인수

그대 노래소리 듣고 있으면

가슴에 전깃줄이 흐르고

어깨에 날개죽지 퍼득거리고

겨드랑이나 발바닥에 불인두

지나간다.

 

대중의 가슴에 닿은 자리

빛 부신 금가루를 뿌리거나

기쁨과 시름의 팔목에다 미끌적거리는

생선비늘을 붙여준다.

 

가수 남인수

그대 <애수의 소야곡>에 실리면

우리 하나로 저 일제 강점기

궁핍에 얹히고

 

그대 <가거라 3.8선>에 실리면

우리 하나로

광복뒤의 숨가쁜 구비의 돌자갈

발 끝에 채이고

그대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 실리면

우리 하나로 전쟁의 참화와 남루를 싣고 가는

기나긴 열차의 기적소리 듣는다.

 

그래 가수 남인수

그대 불렀던 1천곡의 노래

지금 서울 충무로 레코드 가게

스피커가

한 곡 골라 뿜어내고

 

중국 만주 순회공연에서

불렀던 노래 한 곡이나

방방곡곡 가설 무대의 달빛 숨소리로

솟아났던 곡 하나

방송국 가요무대에 올려지지만

 

그 노래

감격의 여울이 되어

이 나라 사람들

가슴이 살아있는 이들의 마음에

방 한 칸에 내어 살고 있음을

보면

 

가수 남인수!

그대 하늘이 낸 사람

별 하나로 반짝거리고 있음을 안다.

 

그대 태어나고

묻힌 진주 하촌동

거기 서걱거리는 풀더미와 풀벌레 소리

이미 하촌동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

 

우리 하나로 그것을 안다

 

*이 시는 강희근 시인이 남인수기념사업회로부터 남인수 35주기 추모 공연 앞머리에 나와 시인으로서 추모시 낭송의 제안에 응한 것으로 '시 읽기의 행복'에 실린 것을 전재하였음

 

 


 

 

강희근 시인 / 중산리 요즘

 

 

발바닥으로 천왕봉 문지르다

실족해 낭떠러지 미끄러져 내리던 구름이

안개에 안겨 버렸다

 

어쩌나 낙차 큰 골짜기의

물비늘이 솟구쳐 김으로 다니는 안개

봉우리 넘어 어디론가 가고 싶어 머리 위

치솟는데

 

어쩌나 구름이 가슴에 와 척

안겨버려 봉우리

넘어가 보기는 커녕 시집 가기 다 틀려버렸다

 

한살림 차려라 구름과 안개

 

피 따로 뼈다귀 따로

간들 간들 목숨으로 서 있는 잡목들 발밑

잠들어 있던 이데올로기 하나 기지개 켜고

일어나

 

한살림 차려라 구름과 안개

소리쳐 준다

 

입 따로 몸둥아리 따로

나날이 푸르러 빛살 더 내지 못하는 풀대

뿌리 언저리 숨어 지내던

다른 이데올로기 하나 그새 나온다!

나와서

 

한살림 차려라 구름과 안개

화답해 준다

 

그러다

소리 안에 들어가 하나로 섞이어

이데올로기 둘

어쩌나 이들이 미사여구 다 내버리고

살림으로 하나가 되었다

 

중산리에 경사났다

 

-시집 『중산리 요즘』(2003)

 

 


 

 

강희근 시인 / 청마와 춘수

 

 

청마와 춘수는 많이 다르다

한 사람이 바다라면

한 사람은 뭍이다

 

청마가 살았던 집

그 집은 약봉지 냄새가 났다

춘수가 살았던 집

그 집은 꽃잎 버는 냄새가 났다

 

청마는 시를 쓸 때 약 달이듯이 쓰고

춘수는 시를 쓸 때 꽃구경 가듯이 쓴다

 

그래서

청마의 시에는 생명이 쿨룩거리는 소리

나고

춘수의 시에는 꽃에다 이름 붙이는 소리

난다

 

아, 청마가 결혼식을 올릴 때

올리며 인생을 시작할 때

유치원생 춘수가 화동花童이 되어 꽃을 바친 것

통영에 가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아는 사람은 말할 때 시인이 된다

꽃다발이 된다

 

-시집 『새벽 통영』(2010)

 

 


 

강희근(姜熙根) 시인

1943년 경남 산청 출생. 호: 하정(昰玎).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 동아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 『연기 및 일기』 『풍경보』 『산에 가서』 『사랑제』 『사랑제 이후』 『화계리』 『소문리를 지나며』 『중산리 요즘』 등. 국립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장·인문대학장, 도서관장, 전체교수 회장 및 전국국공립대교수협의회의 부회장, 배달말학회장, 경남문인협회 회장을 역임. 현재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경남펜클럽회장. 공보부 신인예술상, 경남도 문화상, 조연현 문학상,  동국문학상, 시예술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