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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호 시인 / 시큰거린 이유
콧등에 기댄 안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릴 때, 문득 내 풍경이 누군가에게 등을 기대고 있는 것 같아 살며시 눈이 감겼다
언젠가부터 앙상한 풍경 속에 당신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억지로 기억해 낸 체취에 기대어 잠들곤 했는데 빗소리에 놀라 눈뜨면 체취는 항상 말끔하게 씻겨져 있었다
장마의 밤이었다 체취가 젖지 않게 마음속에 코를 닮은 오두막을 짓고 창을 활짝 열어 놓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아 창밖으로 목을 빼내 킁킁거렸다
콧등으로 빗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손석호 시인 / 들돌
삼강 나루터에선 들 수 있는 돌의 크기로 품삯을 정했다고 한다 깍지 낀 손을 수없이 미끄러져 나갔을 크고 작은 들돌 저마다의 식솔을 악물고 들어 올린 채 허청거리던 허공을 얼마나 오래 버텼을까 살며 들어온 내 돌의 크기를 가늠하는 동안 병세 깊어진 아버지가 유심히 들돌을 바라본다 아직 들어 올릴 게 있는 걸까 아침마다 눈꺼풀 무게도 버거워하던 부끄러운 일상을 깜박일 때 바투 앉아 지나온 시간을 달래듯 쓰다듬는다 손끝과 침묵의 간극, 더는 미끄러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생은 깍지 끼고 꼭 끌어안아도 빠져나가는 것 무심코 들돌에 걸린 발등을 본능처럼 빼내 숨기며 들돌 너머로 미끄러지는 시선 억새가 갱빈을 끌어안는다 박힌 돌이고 싶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바라보는 강가 아버지가 긴 깍지의 시간을 풀어 주듯 손가락을 씻고 강물은 미끄러지는 일이 섭리라는 듯 서녘 길로 윤슬을 흩뿌리며 흘러 나간다 갱빈에 앉은 나는 양손으로 들풀을 꽉 쥐고 있다
*들돌: 삼강 나루터에서 일꾼의 품삯을 정하는 용도로 사용한 크고 작은 둥근 돌. *삼강: 내성천,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경북 예천군의 지명.
손석호 시인 / 울음을 미장하다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슬퍼서 웃었다 울음도 자주 울면 얇아져 미장 층처럼 거친 세상에서 쉽게 찢어지고 때론 낯선 지하도 바닥에 떨어져 덩어리째 아무렇게 굳었다 울퉁불퉁한 초벌 바름 표면에 밀어 넣던 통증 부스러기 흩날리고 햇볕에 그을린 당신이 재벌 바름 되기 시작하자 무엇이든 세 번은 발라야 얼굴을 갖게 된다며 바빠지는 흙손 흙손 뒷면에 노을이 들이치고 붉어져 선명하게 드러나는 화상흔 예상치 못한 화재였다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아물 때마다 뜯어내던 눅눅한 당신과 욱여넣어야 할 요철 많던 삶의 벽면 정처 없이 떠돌며 표정을 미장했으나 얼굴에서 꺼지지 않는 화염 노을에 불을 붙인다 이마에 기댄 팔뚝을 타고 타오르는 붉은 손목의 감정들 어디든 지나가면 평평해지던 흙손을 놓친다
가까워지는 소방차 사이렌 소리 황급히 골목을 돌아 나가고 있다
손석호 시인 / 스파이더맨
나는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악의 꽃의 어느 페이지에 손가락을 꽂아 두고 있었고 형은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는데 잠자리가 우리의 여름방학처럼 거미줄에 달라붙어 퍼덕이고 있었어
형은 잠자릴 떼어 내 날려 보내며 말했지 겹겹이 둥글게 갇힌 과녁처럼 거미줄의 끈끈한 가로줄은 위험해 거미는 위험할 때 끈끈이 없는 세로줄을 타고 잽싸게 땅바닥으로 도망친대 거미도 가로줄엔 붙으니까
즐겁지는 않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거미줄보다 낮은 곳에 살고 있지 그렇다고 절대로 기어 다니지는 않아 주로 걷는 척 뛰어 다니지 높은 곳은 쳐다보지 않아서 줄이나 빽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십 년 만에 만난 형은 이제 줄 타며 산다고 한다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지 않아 한 뭉치의 세로줄을 둘러매고 다니며 공중에서 세로줄을 타고 땅바닥으로 도망치며 산다고, 이십 층 이상 올라가면 일당이 십만 원 올라간다고
-문장 웹진 10월호 발표
손석호 시인 / 자판
꽃이 늦는 봄은 참을게 많아서일까
ㅅ이 고장난 뒤로 참을게 많아진 나는 짧은 문장 짧아서 이해시킬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해쓱한 뒷모습을 꾹 누르고 있다
남은 모음은 모두 울음
ㅅ 대신 써보는 ㄴ과 ㅇ 나랑, 아랑 날아볼게, 알아볼게
사랑은 손끝에서 허물어지고 살아온 날이 어딘가로 가있고 살아갈 날은 흩어진다
나 봄일까 여름이 다가오는데 나 봄일까
꽃봉의 귓불에 입술을 갖다 대고 숨을 참는다
긴문장은 ㅅ 없이도 눈치챌 수 있을 텐데 짧은 문장이 밤을 누르고 누른다
나 봄일까
손석호 시인 / 사랑, 입혀주는 일이다
사랑이 어려웠던 나는 사랑이라 말하고 옷을 벗었다 사랑이 불편하다는 당신은 이별이라 말하고 옷을 입었다
무엇이든 보여주는 거라고 믿었던 나는 벗으라 강요했고 당신은 무언가를 감추기에 바빴다 그런 밥은 너무 밝아서 아팠고 팔뚝으로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더는 벗을게 없던 새벽 집착은 추웠다 일어나니 멍든 알몸과 두려운 바깥
터럭이 자라나길 기다렸지만 느렸고 멍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옷을 입혀주었더라면, 이런 생각이 든 건 슬픔이 무성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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