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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경 시인 / 무정란을 깨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1.
김종경 시인 / 무정란을 깨며

김종경 시인 / 무정란을 깨며

 

 

아기 우는 소리는

사라지고

때늦은 부음訃音만

무성해

 

온종일 불 밝힌

양계장 닭들은

하루 두 번

산란의 고통으로

태어나고

 

 


 

 

김종경 시인 / 거울을 안 보는 여자

 

 

공다원 시인에게

네일샵 직원이 묻는다

 

눈도 안 보이는데

손톱 단장은 왜…?

 

보는 사람들

기분 좋으라고요

 

거울 없이도

혼자서

화장을 잘하는

그녀,

 

시인은

창을 열어젖히고

날아가는

새와 구름을

환히 바라본다

 

 


 

 

김종경 시인 / 아리랑 요양원

 

 

 고려인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에 취재를 갔다 광활한 목화밭 사진을 찍던 중 흰 다래 솜 몇 개를 슬쩍해와 싹틔우고, 꽃을 피웠다

 

 흰색으로 피었다가 연분홍으로 바뀌어 물드는 꽃송이 평생 목화밭을 보며 살아온 고려인 1세대 아흔여섯 김귀둥야 할머니의 얼굴을 쏙 빼닮았는데

 

 세월조차 비껴갔건만 뭐가 그리도 수줍은지 주름 많던 얼굴엔 홍조가 번져왔다 아리랑 요양원을 떠나버린 그녀의 창가 소리가 귓전을 맴도는데, 얼굴 가득 피어나던 목화꽃 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김종경 시인 / 국수(國手)*

 

 

이십여 년만이라며

노 시인이 주선한 소설가 김성동과의

술자리에 끼었다.

 

봄볕이 햇살 거리던 오후 창가엔

오래된 안부와 취기로 흥이 무르익고,

 

출가(出家) 이력이 같다며

아우 성동에게 ‘뒷 스승’이라 불러

진심어린 존경을 표하던 노 시인,

우리 민족의 언어를 알려거든

한 권만이라도 꼭 읽어봐야 한다던

말의 ‘국수’

 

노 시인 앞에서

술에 취한 국수는 힘없는 말만

허공에 휘두르며 졸다 깨다를 반복하니

누렇게 익어가던 햇살도

이른 파장(罷場)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몇 달 후, 낙엽이 질 무렵

노 시인은 예견했던 것일까

‘김성동을 곡함’이라는 뜨거운 눈물의

추모시로 울어버렸는데

 

그때, 나는

잔치국수인지 칼국수인지 헷갈려

주문조차 못 했던 국수보다

만다라*의 부고가 더 먼저와

어이없어 울고 말았지

 

*국수(國手): 바둑·장기 따위의 실력이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람

*만다라(曼茶羅): 김성동의 장편소설.

 

 


 

 

김종경 시인 /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

 

 

누가 처음

저 아름다운 나비를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이라

명명했을까?

 

긴 가뭄의 끝자락에서

꽃씨방처럼

울음을 터트렸을

푸른 나방의 애벌레가

성충의 날개를 펴고

달빛 쏟아지던 여울목에서

푸드덕푸드덕

첫 비행을 시작할 무렵,

 

이름도 길고 긴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나는

온몸을 어둠에 적신

검은 고양이처럼 옹크린 채

눈망울만 껌벅거렸지

 

잔별들이

거대한 우주의 그늘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던 순간,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은

밤새 좌충우돌 날갯짓을 하다

어둠을 가르며

어딘가로 날아오르고

 

배추이파리와

동박새 날개를 닮았다는

나방의 작명가는

분명, 시인을 꿈꾸는

늙은 농부였을지도 모를 일

절묘한 작명의 기원을

상상하는 즐거운 여름밤이다

 

 


 

 

김종경 시인 / 트라우마

 

 

수천,

수만의 비명들

땅속 깊이

파묻고

돌아온 날

 

비명은

끊임없이

어둠 속에

새끼를 낳고

또,

낳고

 

 


 

 

김종경 시인 /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오일장마다

‘믿음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붉은 조끼들이

천국행 암표를 팔고 있다

십자가를 등에 진 종말론자는

옆구리에 스피커를 매단 채

그분이 너희 죄를 사했노라고,

여장 남자 각설이는

호박엿은 구원이 아니라

만 원에 네 개라며,

이미 구원을 받은 듯

찬송가보다 더 크게

뽕짝을 불러댔다

누런 푸들을 앞에 태운

노인의 전동휠체어는

호박엿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서둘러 귀가하고

땅바닥을 끌며

찬송가를 부르는 박물 장수에게

천 원짜리 면봉과

편지 봉투 한 묶음을 사는

사람들,

그가 애벌레를 닮았다며

그림자마저

조심스레 비껴가고

그는 오늘도 온몸으로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노을 밖 세상을

구원 중이다

-시집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2023년

 

 


 

김종경 시인

1967년 경기도 용인 출생. 언론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신방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과정 수료. 2008년 계간 '불교문예' 등단 작품활동 시작, 시집 『기우뚱, 날다』 저서로 포토에세이 <독수리의 꿈이 있음. 용인신문발행인, 대표.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환경사진협회 초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