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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기현 시인 / 불국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1.
조기현 시인 / 불국사

조기현 시인 / 불국사

 

 

 오래된 집은 사람처럼 앓습니다 이 빠지고 귀 어둡고 해소 가래 기침에 시달리지요 관절염 앓는 바람이 절룩이며 지나가자 가르릉 가래 끓는 소리에 낙엽이 뒤를 좆습니다 가을이면 나는 내장을 빼낸 생선 울긋불긋 갖은 양념 뒤집어쓰고서 끓습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라지만 말처럼 쉽습니까 청명한 바람이 오래된 축음기판을 지익 긁고 지나가는 소리에 서리 맞은 꽃들이 문득 깨어나 마당에서 툭 툭 불거집니다 애신각라 애신각라* 틀린 꽃 속에서는 막차 떠나는 소리도 들립니다 이 집엔 금나라를 떠난 툰드라가 살고 있어서 문고리에는 늘 살이 묻어있습니다 부리에 피를 묻혀야 우는 새가 뒤뜰에서 울면 나는 피를 빼낸 불국사 퓨즈 나간 나무가 되어 전기 없이도 홀로 타오릅니다

 

* 愛新覺羅: 청나라 황족의 성씨이다.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뜻

 

 


 

 

조기현 시인 / 가석방

- J. L. 보르헤스에게

 

 

작은

새 한 마리

장서실 창 안으로

날아들었다

 

서가 사이

깃 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서책書冊들이

떨었다

 

판옵티콘*으로

칸칸 늘어선, 서가들

미라가 되어 잠든

혁명革命의 기호들

 

달빛의 향기며,

너를 향해 벋었던 내 어깨며 손

모두, 문드러졌구나!

 

가장 오래 묵은 서책 한 권을

기어이 집어던졌다

 

창밖으로

새를, 내보냈다

 

*판옵티콘: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 감옥

 

 


 

 

조기현 시인 / 비탈길에서 개가 짖다

- 니체의 시, <고독>에 답함

 

 

 그 언제였던가, 밤은 습관처럼 깊어가고, 문고리를 닫아건 채 맞추고 또 맞추어도 대차대조표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던, 그런 날들의 시절 인생이란 그저 멀기도 하고 짧기도 한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몇 구비나 헛돌아서 목적지도 없이 시계 침처럼 뚜벅뚜벅 가고 있었지.

 

 취한 척, 하나마나한 말들을 함부로 뇌까리며 대화란 걸 나누었던가. 우리가 내뱉은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서 숨어 잠드는지, 참으로 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누운 그 차가운 밤공기 속에 스적이는 소리만이 오가고 있었지.

 

 그 길, 먹구름 가득한 하늘엔 별도 없어 때마침 비탈에서 주저앉아 쉬어 가는데, 까마귀들이 물고가다 떨어트린 말들이 이런 소리로 들려왔어.

 

 - 곧 눈발 내릴 텐데. 우리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저기 봐, 자기 목을 스스로 조르며, 살려다오! 죽여줘! 소리 질러대네.

 

 그 많은 말들 도중에 불쑥 이런 말도 들렸어.

 

 - 당신, 어디 사는가?

 

 실은 내게 물은 말도 아니었고 또한 단지 거주지를 확인하는 말일 뿐이었는데도, 왠지 다르게 들렸어. 하여 나는 혼잣말처럼 되물었지.

 

 - 고향을 묻는가, 거 무슨 말인가?

 

 그러고는 다급히 이렇게 지껄여댔지.

 

 - 눈발 흩날리네!

 - 추억을 되뇌면 무엇해, 그만 둬!

 - 창문마다 성에가 끼었어.

 - 잠든 집들을 지나서, 가야지. 우리 집으로,

 - 집이 없다고? 없더라도, 없는 집을 찾아서, 가야지, 삼십 촉 백열전구 불빛 익은 봉창封窓 아래로······.

 

 우리가 눈 내리는 비탈을 다시 오르려 일어서자, 마치 하늘에서 풀쩍 뛰어내려온 듯 검은개 한 마리, 우리를 가로막고 무슨 웅변을 하듯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어.

 

 


 

 

조기현 시인 / 눈매

 

 

 하옥리* 당산 숲에 소쩍새가 산다.

 칠월 아침 숲을 감싸며 스며드는 빛살에 그 소쩍새 눈이 부셔 내내 졸다가, 어스름밤이 되어서야 홀로 은밀히 싸돌아다닌다.

 자정이 넘어서 숲이 차츰 안온해지고 달도 홀로 머쓱히 비칠 즈음이면 저도 심심해지는지, 사백 년, 중허리 부러진 전나무 가지에 숨은 듯이 앉아 사람 구경을 한다.

 세월처럼 목이 굽은 사내와, 산 아래 내려갔다 절며 돌아온 또 한 사내, 둘이서 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올려다보면 저도 한잔 하고픈 양 목을 움칫거린다.

 그래 말씀들 계속 하소, 거 듣기도 맛나네! 하면서, 새도록 그럴 듯이 앉았다.

 동이 트는 무렵 냇가에 나가 낯을 씻으니, 소쩍새는 자취를 감추었고,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다, 산 비알 감자밭을 새벽같이 나온 마을 노인네

그 소쩍새 눈매다.

 

*하옥리: 下玉里,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에 있는 옥계 계곡 상류 마을. 하옥초등학교(1970.12.29 - 1992.3.11)는 폐교되고 경상북도포항학생야영장이 들어서 있다. 그 동편 숲 속에 300-400여 년생 전나무(가슴둘레:4.3m, 수고:40-50m) 당산목이 있는데, 1998년 돌풍에 의해 중허리가 부러졌다.

 

 


 

 

조기현 시인 / 눈물 모르는 눈매와

 

 

날아 내리네!

윤슬 깔린 겨울 하천에

어제처럼 또 한 쌍

오리가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지난 3월 20일 만경강에서 포획하여 ‘위치 추적기(GPS)’를 부착한 청둥오리 2개체 중 1개체가 국내로 다시 돌아온 것을 확인하였다. 해당 개체는 이후 경기도 이천 및 강원도 철원, 북한지역을 지나 6월 8일에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인근 송화강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여름을 지낸 후 지난 11월 8일 겨울을 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여 11월 22일 경기도 이천시 복하천에 도래한 것으로…….

날아오르고 또 날아 내리는

벅찬 날갯짓, 하염없는 물질

떠다니고 떠나가며 그렇게

수 천리 하늘과 땅을 오가야 하기에

외려 눈물 모르는 저 눈매,

밤이 들어서야 비로소

얼음 칼이 박힌 듯 시린 것을

갈밭에 옴츠리고서

저 혼자 품으로 품어 녹일

저 붉은

두 발

참말로 어이 저리 닮았나!

피난길 만삭인 몸으로 나섰던

노당댁(宅) 내 어매

동지섣달 수돗가에 앉아

김장을 하던 하숙집 아낙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맞으시던

글썽이던 그 눈매,

엄동이면 외려 화끈대던

그 두 손과

 

 


 

 

조기현 시인 / 숨은 신神

 

 

쓰러기 야적장,

어릴적 내 놀이터

그곳만이 진정 학교였다

 

생활의 잔해들 속을

샅샅이 뒤지고 되짚어 보며 알게 된 진실

인간만이 쓰레기를 남긴다는 것

 

신이란 존재가 지금도

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리고 투명하던 내 눈길과 겹치리라)

 

쓰레기 야적장, 아닌가?

꽃이 피지 않는 곳

꽃을 피우기까지 오래 썩어야 하는 곳

 

꽃을 먼저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신이 나를 버려두고 숨어버렸다면

그 까닭도 다를 바 없지

 

아닌가?

 

 


 

 

조기현 시인 / 킨텍스 나비

 

 

1.

밤새 방충망에 붙어 있던 것도

나방이었다

 

어디로 갔을까, 꽃밭과 나비들

 

배추꽃 너무 파밭을 날던 우주宇宙 비행선들

코스모스를 물고 가을 언덕을 넘어가던 천국의 바이킹들

째크나이프*로 달빛을 깎던 코털 까무스름해지던 녀석들

연분홍치마에 봄바람 불던 삼거리 막걸리집 벽계수들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추억들

 

2.

나비가 있다

 

일산 킨텍스 세계생태나비박람회장

음습한 분실 안

즐비한 유리 상자 속

포르말린에 절어 박제가 된

영원을 향해 날아가는 날갯짓,

순간에 붙들려 있는

미라mirra들

 

- 어째 이곳 공기는 미동도 없는가!

 

투명 줄에 매달려, 한 영혼이

날고 있다

 

*송찬호의 시 <나비>에서

 

 


 

조기현 시인

1962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졸업. 1983년 <시와 해방> 동인으로 작품 활동하여 1986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길들의 여행』 등. 그 외 문학평론 활동. <시와 해방>동인(1983). 계간 《사이펀》 편집위원. 경주문인협회 회원.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경주고등학교 국어 교사(2021학년도를 마지막으로 명예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