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지인 시인 / 내 안의 바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2.
최지인 시인 / 내 안의 바다

최지인 시인 / 내 안의 바다

 

 

내 안엔 늘 깊은 바다가 산다  

 

바람이 지운 햇살

하오의 문양으로 일어서는

방파제에 서면

산등성이로 길게 누워있던

수평선이

나의 입덧을 손질하며 헤엄쳐 온다

바다의 깃털에 운신하며

겁 없이 넘나드는 바닷새들이

내 부산한 시름을 물고

자맥질을 한다  

 

어깨를 나란히 한 일몰

그 소실점 사이에서 경계로 있는

정내리 어촌 부근,

 

 


 

 

최지인 시인 / 등燈

 

 

새끼들

다 흩어지고  

 

당신마저

산에 가서 누우시던 날  

 

행여 찾아올까

기다림은 연년이 깊어질 줄 아시고  

 

연시, 그 붉은 등을

감나무에 달아두고 가셨다

 

 


 

 

최지인 시인 / 삶의 속도를 보다

 

 

출근 길

차창 밖으로

버스와 함께 아침을 달리는

자전거 하나  

 

차츰 멀어지다

신호등 앞에서

다시 만난 동그란 여유  

 

버둥거릴수록

삶의 속도는

제 중심을 벗어나지  

 

이 아침,

바퀴살에 걸린

정겨운 여백이 눈부시다

 

-시집 <오래된 약속>에서

 

 


 

 

최지인 시인 / 밭을 갈며

 

 

어림잡아 서너 평이나 될까

이사 가는 이웃으로부터 얼결에 넘겨받은

아파트 옆 산자락 공터 밭

웃자란 풀과 씨름하며

한 두럭을 돋우고 나니

해가 정수리 위에서 쨍쨍하다

 

중간 중간 허리를 두드리며

버릇처럼 목축인 시간이

서툰 노동의 무게를 저울질 하다

길게 늘어져버렸다

 

마른입 축이며

밭머리에 오글오글 모여 있던

여러 종류의 씨앗들이

해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쯤에야

툴툴거리며 제 자리를 잡는다

 

풍성한 식탁을 미리 당겨놓고

자족의 웃음을 물다가

문득 가슴이 아린다

엄마팔자 닮지 말라고

호미자루 한번 못 쥐게 했던 어머님의 세월을

밭 두럭 위에서 읽게 될 줄이야

 

 


 

 

최지인 시인 /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급정거한 버스가 경적을 울릴 때

우리는 알았다

잘못된 길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차선 도로에서

끝과 끝으로

핸들을 돌리며

전진과 후진을 계속했다비상등을 켜고

생각했다

이 길은 올바른가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우리는

유혈사태로 가득한 주말을 목격했다

시민의 삶은 고독하고 궁핍하며 짧다

이를테면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며

버리지 않은 서랍 속

너절한 잡동사니처럼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밀어내고 있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

수도복 입은 수녀가

소총 든 군경들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고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군경들은 시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혁명의 법칙

생각만 하지 말고, 당신은 피처럼 용감해야 합니다*

군부는 시민에게 죄를 물었다

외할머니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자주 절망하되 희망을 잃지 말거라

아주 오래전 일이다

가장 약한 자부터

외로워질 것이다

공장을 불태우고

악은 물러가라

악은 물러가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치는

사람들

그사이 나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부모에게 돈을 빌려

스물한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견고해 보이던 일상은

빛과 어둠처럼

무너져버렸고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진 세상이 일상이 되었다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므로

누구도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신은 이 세상을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앞을 가로막은 현실

내일의 일과 이번주의 일

나는 누구지?

잠에서 깬 아내를 쓰다듬으며

이젠 괜찮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군부의 공격에 맞섰다

달리는 오토바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모든 것을 빼앗는

불한당에게,

손을 높이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쳤다

악은 물러가라

악은 물러가라

* 2021년 2월부터 미얀마 모니와 지역에서 시민불복종 운동이 전개됐다. 이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한목소리로 “군부 타도”를 외쳤다. 「두개골에 대하여」라는 시를 쓴 시인은 군부에 의해 살해당했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시인을 군인들이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가 지나간자리는 피로 물들었다.

 

 


 

 

최지인 시인 / 파종

 

 

억세게 내린 비

뿌리가 드러났다

밭 가장자리

구덩이 파고

사람들 일렬로

세운 뒤

죽인 흔적

 

*

 

(사건 발생 및 유해 매장 관련 지번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산39)

 

위 장소는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납치된 반공 인사 및 민간인 집단 학살 유해 매장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감히 삶에 대하여

묻습니다

 

죽음을 모르는데

어찌 삶을 알겠습니까

 

*

 

당신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

얼마 후 전쟁터에 나갔다.

 

왼손에 총상을 입었으나

생존에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복무했던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은 베트남전쟁에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마구 죽였다.

 

나는 사로(射路)에 엎드려 총을 쏘았다.

총성과 뺨으로 전해지는

총기의 반동.

표적지를 빗나간 탄환이 흙벽에 박혔다.

 

할머니는 죽어서

현충원에 묻힐 것이다.

선산에 묻힌 남편 묘를 이장해

합장할 것이다.

 

-시집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아시아, 2023)

 

 


 

 

최지인 시인 / 비정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이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가지 계속 걸었다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에서

 

 


 

최지인 시인

1990년 경기도 광명 출생. 중앙대 연극학과를 졸업.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제10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 제40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