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진 시인 / 언플러그드
저리도 숨소리가 크면 금방 들키고 말 거라 생각했을 뿐인데 그는 이제 공원에 오지 않는다 조깅을 하는 사람이 비슷한 숨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나를 봤을까
여기엔 유명한 카페가 있는데 커다란 페르시안 고양이 두 마리가 이곳의 명물이다 그런데도 외롭나봐 몸을 둥글게 말고 자기 젖을 빨고 있던데 오갈 데 없는 애착을 쏟으며 자기를 도모하는 게 얼핏 우아해 보이던데 페르시안 러그 위의 페르시안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나
발신 불명의 날벌레들은 여지없이 한 호흡으로 사라지는데 누군가는 긴 수염을 누군가는 긴 꼬리를 흔들며 쉽게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낸다
태어나기 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유리가 되기 전의 유리를 손에 쥐어본 적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겠지 싶어 번호를 아는 것만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민트 캔디를 다 먹고 난 틴케이스에 한 가닥 씩 바닥에 떨어진 고양이 수염을 모은다 언젠가 이 틴케이스를 고양이 수염으로 가득 채워야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게 뚜껑을 잃지 말아야지
지난 계절의 잡지를 다 읽기도 전에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계간지가 도착한다 그래도 과월호 하나 버리지 못했다…… 손 위에 고양이 수염을 얹으면 손금과 딱 맞다
무소식을 정당하게 만드는 화병 속의 죽음 무지가 미지에게 미필적 고의를 인정한다 몇 개 없는 연락처에서 몇 개의 번호를 지웠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길이 모두 바뀌고 난 뒤 차단벽을 따라 나갔다 돌아오면 오늘은 내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제9회 시산맥 작품상
김정진 시인 / 논픽션
중간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남자라는 걸 소설의 중간까지 읽고서야 알았다 일생이 절반에 이르기까지 여자였던 남자는 책장이 넘어가듯 단순하게 생을 바꿔버리는데 남자가 된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사 없는 노래를 불러준다
새벽은 금세 저물어 첫차는 다가오고
그가 된 그녀는 그란 사람 말도 없이 떠나버렸나 파쇄기에 갈려버린 마음을 안고 금 하나를 넘지 못해 애만 태우다가 한 곡도 다 못 맺고서 동면冬眠을 간다 그녀였던 그는 그녀가 간 줄 모르고 이불을 개다 그날 아침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쌓이기만 하고 녹지 않는 눈이었다
다시 펼쳐보아도 이미 이불 속에 그녀는 없고 돌아갔어도 덮어쓰기 된 생이 끝 간 데 없어 여자였던 남자는 원래 남자였던 남자로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 모두가 떠났고 모두가 남겨진 소설에서 종종 그는 그녀를 떠올렸고 중간의 중간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그인 줄 알았건만 덮고 나면 그마저도 흐릿해지는 오리무중의 폭설 감감한 마음을 만져보다가 네가 머리에 쌓인 것을 털며 들어온다
먼 사람들은 모두 잘 지내지 않으냐
김정진 시인 / 여름 감기
오늘도 너는 네 안으로 출근하며 적자의 생활을 이어간다
요즘엔 골목 어느 집의 담장을 뒤덮은 덩굴 장미가 예쁘고 그 담장을 지나오면 데려온 적 없는 붉음이 방 안에 방울진 채 떨어져 있다
매일 써오던 일기의 두께로
올해의 어디쯤을 가늠하면서 가뭇없이 희고 순결한 것을 쌓아가고 버릴 게 없는 생활은 모을수록 부족해진다
너는 짙어지는 더위에도 긴옷을 껴입고서 담장 앞을 지나간다 마르면 버리던 꽃을 말려서 꽂아 놓는다 머리가 무거워 점점 휘다 못해 목이 꺾인 꽃은 짐승이 되어가고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을 삼키며 하나 둘 떨어지는 꽃머리들 툭툭 치우고 일어난다
어제가 그제 같고 그제가 오늘 같은 경계 없는 자리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커튼을 걷으면 쏟아지는 햇빛은 신맛이었다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골목을 돌며 수취인의 이름을 부르는 우체부들 약기운에 덜 깬 잠을 부여잡으며 대답할 때 잃어버린 머리를 찾으며 신음하는 줄기들 이파리들
김정진 시인 / 동기화
오랜만에 길에서 우연히 너를 발견하고 불렀는데 너는 네가 네가 아니라 너의 이미테이션이라고 했다 그건 닮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너는 닮았다는 게 아니라 네가 너의 이미테이션이라고 반복했다
너는 네가 아니고 너와 닮은 사람도 아니고 너의 이미테이션이구나 그렇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너의 이름과 말을 하며 오른손으로 턱을 자주 만지는 습관과 종잇장처럼 소리없이 사뿐거리며 걷는 발걸음과 오른쪽에만 서서 걸으려는 고집까지 모두 너와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너는 네가 아니고 너의 이미테이션
지구엔 사람이 정말로 많으니까 이름부터 생김새와 습관까지 똑같은 사람이 어딘가엔 있을 거야 생각했지만 이미테이션은 그보다 더 똑같은 사람 똑같은 것보다 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그런데도 네가 네가 아니라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너는 그러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사람 그 말을 믿을 때에야 너는 가능했다
하나도 안 변했네 한참만에 나를 알아보고 네가 대답했다
김정진 시인 / 알코올 혹은 콘크리트
보라색 물을 놓아둔 방 안에는 보라색 물의 입자가 떠다니고 당신이 판서해 둔 이름은 보호색을 잃었다. 내 이름은 빨강. 다시는 숨은 채 기도하지 못하리라. 야경이 유명한 도시에는 야맹증을 가진 이들과 눈이 좋지 못한 자들이 안경을 벗고 모여든다. 멀리서 본 풍경은 희극적이리니 실없는 웃음에 너도나도 목소리가 두 개씩이다. 모호할수록 황홀한 야경. 저 짓무른 빛의 덩어리가 우리의 태양이야. 물 위에 뜬 기름띠에서 건진 무지개는 우리의 깃발이지. 나를 발견한 당신이 비극배우의 표정을 하지만 내겐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증발하는 입자들을 잔뜩 마시면 몸속도 보랏빛이 되는 걸까. 팔다리가 있는 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네. 그것도 아픈 건데, 아픈 줄 모르고 우리는 웃으며 야경을 구경한다. 빛 속에 숨는 것과 어둠 속에 숨는 것은 다를 게 뭐가 있나. 새로 얻은 보호색은 당신들을 위한 것. 내 이름은 빨강, 내 이름은 파랑, 내 이름은 보라, 네 이름은 초록, 네 이름은 노랑…… 차가운 손을 가진 내가 더 차가운 네 손을 만지면 너는 내가 뜨겁다고 말한다. 우리도 모여 있으면 저 야경과 같을까요. 벗은 눈으로 반짝거리며. 두 개의 목소리 중 하나가 숨죽인다. 이른 새벽, 지시등 없이 차선을 침범해 들어오는 무겁고 낮은 트럭처럼 우리의 생애 불심검문. 내가 내 머리 위에서 비극적인 잠. 든다.
김정진 시인 / 졸업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이름이 모두 꽃이었다. 나는 백합에 살았고 친한 친구들은 모두 장미에 살았다. 내가 좋아하던 선생님은 목련에 살아서 나는 방과 후 저녁마다 백합과 장미 사이에 있는 언덕을 넘어 선생님 집 문을 두드리곤 했다. 사회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집에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는데 조금 기다리면 선생님이 왔다. 선생님이 오면 선생님과 나는 목련에서 출발해 장미를 돌아가면 나오는 해안도로 너머 거대한 제철소의 야경을 구경하다 돌아왔다. 늦봄엔 잔뜩 쌓인 벚꽃잎을 밟으며 왔고 늦여름엔 곳곳에 떨어진 매미 시체를 밟지 않으려 애쓰며 왔다.
별로 큰 동네도 아닌데, 동네는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 쪽엔 백합과 매화, 송죽이 있었고 작은 언덕을 넘어 가면 제일 먼저 동백이 나왔다. 동백을 지나면 목련이 나왔고 목련을 지나면 비로소 넓은 장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장미는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붉은 기와로 지붕을 올린 모양. 키가 작은 아파트들 사이로 우린 소문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다녔다. 소문이 사람보다 빨라 무섭다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들키지 않은 비밀들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학교에 가면 장미가 있었고 주차장의 앞뒤로 계절을 따라 겨울엔 동백이, 날이 풀리면 목련이 제일 먼저 피었다. 목련 잎이 떨어지면 매화와 벚꽃이 차례로 피었는데, 백합은 어떻게 생긴 꽃일까. 어째서 지금까지 그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국어 선생님이 백합은 원래 바다라고 했다. 매화와 송죽은 갯벌이었고 장미랑 목련도 바다 근처의 땅이라고 했다. 너희는 바다 위에 앉아 수업을 받고 있는 거야. 우리는 동네를 휘감고 있는 게 강인 줄 알았잖아. 매일 해안도로를 지나면서도 바다는 전혀 바다처럼 보이지 않아서, 우린 그게 강인 줄 알았잖아. 어느 날엔 친한 친구 둘이랑 영어과외를 마치고 밤늦은 시간에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 뛰기 시작한 거지? 다리 밑을 지날 무렵에야 궁금해졌고, 내가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냐고 물어봤다. 친구 하나가 안식처로 가고 있다고 했다. 그게 어딘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냥 아, 우리는 안식처로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김정진 시인 / 실험연극의 이해
겨울잠을 준비하며 먹이를 구하는 시간 이곳엔 도무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다 아무도 없겠지 싶은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불행을 미리 상상하면 가끔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잇몸에 숨어 있는 사랑니를 혀끝으로 굴리며 행운의 대립항들을 떠올린다
무엇이 모여 오늘의 총합을 이루는가
썩은 낙과를 손가락으로 짓무르면 쇄빙선이 얼음 깨는 소리가 들린다 미심쩍은 의문들을 뒤로 하고 일단 커튼부터 친다 어깨에서 시작된 두드러기는 등 전체로 번졌다 나무껍질의 질감으로 번성한다
구역에는 구역의 규칙이 있고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구덩이를 파고 싶다면 구덩이를 파고 거꾸로 눕고 싶다면 거꾸로 눕고 초대하고 싶다면 초대를 전원을 눌러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스탠드를 껴안고 무연고의 밤이 계속되는 곳으로
잊지 않기 위해 쓰기 시작한 일기엔 이미 기억하는 일 뿐이었다 자연변이도 누군가의 의도일까 무엇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를 뒤죽박죽
놓쳐버린 조난신호처럼 희미한 징후로만 당신을 느낀다 그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유령이 입김으로 방문하는 시간
암전된 곳에 비상등이 고고히 빛나고 요새가 무너지는 데는 며칠이 필요하지 않았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진영 시인 / 즐거운 점심 외 6편 (0) | 2025.11.22 |
|---|---|
| 한세정 시인 / 내 손 안의 권총 외 6편 (0) | 2025.11.22 |
| 박정대 시인 / 내 청춘이 지나가네 외 6편 (0) | 2025.11.22 |
| 최지인 시인 / 내 안의 바다 외 6편 (0) | 2025.11.22 |
| 전하라 시인 / 길을 튜닝하다 외 7편 (0) | 2025.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