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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정 시인 / 내 손 안의 권총
귓속을 채우는 소리를 제거하라 나의 관자놀이는 나만의 것이므로 내 손 안의 권총은 몸 밖으로 열린 두 개의 귀를 관통할 것이다 총성은 유리 벽을 뚫고 네 시의 거리를 향해 울려 퍼질 것이다 탄환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거리 당신의 뒤통수가 달아오르고 전신주는 수직으로 몸을 뻗는다 나의 목표는 관자놀이를 분쇄하는 것 과녁을 꿰뚫는 건 손을 가진 자의 자유이므로 망막을 찢고 들어오는 눈동자들을 몰아내라 내 손 안의 권총은 몸 밖으로 열린 귀를 사수하고 있으므로 권총에 대해 나는 여전히 승자이므로 당신의 관자놀이는 나의 과녁과 무관하므로,
한세정 시인 / 물고기의 노래
지금 내 몸을 흔드는 것이 네가 지나간 여정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곳에서 길을 잃을 텐데 눈빛으로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러 줄 텐데 수초처럼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후렴구처럼 오래오래 네 귀를 쓰다듬어 줄 텐데
물살을 끌어안으며 투명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물고기의 노래를 듣는다
한세정 시인 / 정글짐 수업이 끝나고 한달음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가면 정글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끼끼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며 단숨에 정글짐을 올랐다 붉은 갈기를 펼친 구름 떼가 몰려들 때까지 정글짐에 매달려 기꺼이 원숭이가 되었다 쇠창살에 갇힌 기분은 어떤 것일까, 헐렁한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정글짐의 안쪽으로 깊숙이 몸을 숨겼다
버짐이 핀 얼굴도 목덜미도 훤히 보였지만 네모난 정글짐에 숨어 있으면 내 몸이 사라진 것 같았다 철제봉에 걸터앉아 무더운 정글을 떠올렸다 매일 한 뼘씩 자라나는 덩굴을 타고 집채만 한 바나나 더미를 따는 상상은 달콤했다 거대한 바나나 잎들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정수리 위로 부스스 흙모래가 쏟아졌다
아슬아슬하게 정상에 올라 두 발을 딛고 그림자가 사라져 가는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조회대 밑 창고에서 내 입을 틀어막던 네 손바닥의 냄새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낚아채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차가운 정글짐을 기어올랐다 언 손에 입김을 불 때마다 찝찔한 쇳내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원숭이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한세정 시인 / 쌍둥이자리
여긴 낯선 말로 생각하는 곳이야 사람들은 다른 말로 인사를 건네고 노래를 부르지 입술의 악보를 따라 구름이 흐르고 떠나는 버스를 향해 아이들은 손을 흔들지 그런 날엔 내 입술은 토끼처럼 실룩거릴 테지만
한때 우린 같은 투망에 걸린 물고기였던 걸까 숨을 쉴 때마다 비늘의 무늬를 나누어 갖네 빈 젖을 쓸어내리며 멀리서 엄마가 이름을 부를 때 다른 거리에서도 우리 얼굴은 닮아 가지 손바닥의 금들은 아무것도 나누지 못할 거야
거리를 지나가는 장례 행렬이 보여 침묵이 이끄는 오 분 간의 이동, 행인은 걸음을 멈추고 성호경을 긋지 세상의 어떤 필체는 다시 쓰이지 않겠지 내가 보낸 엽서가 대륙의 반대편에서 되돌아올 때 우리 입술은 다른 연인의 입술에 포개어지고 세상은 잠시 기울어지지 안녕, 오늘은 누군가 낯선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날이야
한세정 시인 / 안녕, 안나푸르나 혹은 안티푸라민
배움은 필요 없어 다만 코끝을 마주 대고 어깨를 다독여 주면 돼 강렬한 태양 때문에 눈이 시릴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장님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나를 떠난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아는 여자가 있었어 퍼렇게 멍이 든 눈가엔 안티푸라민이 번들거렸지 여자는 하루 종일 식당 뒷문에 쪼그리고 앉아 고등어를 구웠어 이런 일과들이 여자를 지나가곤 했어 달궈진 석쇠 위에서 고등어의 퍼런 껍질이 곪은 종기처럼 부풀다가 터지고 여자는 말없이 눈가에 안티푸라민을 덧발랐지 울음의 무늬를 기억하는 굴곡을 어루만지며
가파른 산비탈마다 멍멍한 귓속을 채우는 나귀들의 방울 소리와 몸을 움츠려야만 닿을 수 있는 협곡들 그러니까 배웅 따윈 필요없어 난 단지 내 안의 굴곡을 벗어나 안나푸르나에 가고 싶을 뿐이야 아직도 눈가 가득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있을 몸 밖의 굴곡을 위해
한세정 시인 / 어둠과 어둠
어둠의 입술을 물고 우리는 어둠에게 젖을 주고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드리운다
눈을 감고 무릎을 꿇을 때 명징해지는 얼굴의 능선들 몸을 감싸는 어둠의 따스함 어둠의 참혹함
무채색 바닥에 무릎의 무늬가 스밀 때까지 우리는 제대에 놓인 제수(祭需)였다가 흘레붙은 연인이었다가
우리는 흩어지는 모래알갱이 캄캄한 오두막에서 두 손 모으고 부르는 흑인의 영가
동굴에 숨어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검은 짐승들
얼굴 속에 얼굴을 묻고 여기, 어둠과 어둠
한세정 시인 / 우리는 소리의 흔적이거나 철로에 묶인 쇠사슬이다
몸 밖의 호흡을 듣기 위해 아이들은 철로를 두드리며 자라나고 등 뒤의 그림자가 윤곽을 삼킬 때 태양은 당신을 향해 기운다
당신은 뜨겁게 달아오른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소실점에서 당신에게로 기차가 달리는 순간 구름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붉게 물든 모든 것은 귓바퀴 속으로 돌진한다
발이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아 아이가 부드러운 페달을 구를 때 달리는 풍경을 겨냥한 나의 두 팔은 얼마나 견고한 허공을 밀어내고 있는가
한낮의 열기 속, 지상의 소리가 모두 휘발되고 일순간에 몰려드는 먹구름처럼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깊이 가라앉는 것이다
숨을 고르며 한쪽으로 고이는 피의 무게를 느낀다 몸 밖의 호흡이 우리를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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