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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정대 시인 / 내 청춘이 지나가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2.
박정대 시인 / 내 청춘이 지나가네

박정대 시인 / 내 청춘이 지나가네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박정대 시인 / 시인박멸

 

 

어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에 들어간다

훌륭하다, 어떤 시인은 제목 없이 시를 쓴다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시가 있듯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삶도 있다

제목이 부실하다는 것은 삶이 부실하다는 것

오늘은 그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삶의 제목으로 삼아라

삼나무에서 삼나무 이파리 자라듯

제목으로부터 삶이 자란다

고독이 분란을 일으키는 삶은

선반 위에 올려두어라

싸늘한 겨울 오후

난롯가에서 그대 시를 쓴다면

제목을 커피와 담배라고 하자

그 모든 성분은 삶으로부터 온 것일지니

커피와 담배의 시는 삶의 시다

담벼락과 마주한 그대 삶의 시를 보아라

처음부터 완성된 시는 없나니

모든 시는 끝내 미완으로 남으리니

커피를 마신 심장에 담배 연기를 풀어 시로 만들라

설령 그것이 사제폭탄이 되더라도

그대가 폭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니

커피와 담배가 만드는 시

침묵이 만드는 열렬한 고독작렬의 시를

그대는 오늘도 세상의 창가에 두고 가느니

세상에 창궐한 시인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족의 시인이 탄생하리라

 

 


 

 

박정대 시인 /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기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나는 찾아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꽃을 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간을 찾아 나는 나섰다

그런데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나 낯설었는데, 어쨌던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네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랬동안 불멸을 꿈꾸어왔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생각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 속에서 수시로 쉬고 존재하며,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 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 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박정대 시인 / 유령(劉伶)

 

 

 유령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술을 마셔라

 

 태풍의 한가운데서라도 술은 너를 위로하리니 사랑이 오지 않을 때도 한세월 술을 마셔라

 

 살아서 네가 마시는 술은 굳건한 너의 生. 너의 생을 생으로 빛나게 하는 것도 술이었나니

술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사랑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시를 쓰고 쓰고 또 쓰다가 그래도 시가 되지 않을 땐 술병座에서 출렁이는 까만 밤의 머루주를 마셔라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가 돼라

 

 


 

 

박정대 시인 /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박정대 시인 /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결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박정대 시인 /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꿈의 호랑이들>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박정대 시인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 『불란서 고아의 지도』.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 2004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2014년 대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