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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원 시인 / 육교 밑 고고학자
반 평 조립식 건물 검은 뿔테안경의 송 씨가 글자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반창고 감긴 손으로 글자의 골격을 맞춰 나갑니다 고분에서 나온 뼈를 다루듯 조심조심 후욱 숨을 불어 넣습니다 그가 새긴 이름들이 종이 위에서 일제히 살아 움직입니다 첫 이름을 새긴 여학생의 두근거림 직인 한 방에 집 날린 사내의 눈물 그리고 두 해 전 가출한 아내의 악다구니도 있습니다 그 잔소리 여지껏 파내지 못해 가슴 깊숙이 박혔습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 수없는 복을 새기느라 그의 뼈가 덜걱거립니다 거리에는 함박눈 한 장이 깔렸습니다 가게 앞으로 목도장과 뿔도장 같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갑니다 발자국을 꾹꾹 찍는 행인들 편의점의 빗자루가 크고 작은 발도장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의 가게 앞 차디찬 백지 한 장도 순식간에 구겨졌습니다 봄이 오면 건너편에 컴퓨터 도장집이 생긴다고, 육교가 철거되기 전 마지막 겨울 오늘은 불빛이 뜨겁습니다 어둠이 소복소복 내리는 저녁 뼛가루 같은 문자들이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그는 육교 밑에서 낯선 이름들을 발굴 중입니다
이해원 시인 / 땡땡거리
하얀 깃발이 부르면 전동차는 서둘러 달려온다 차단기가 몸을 눕힐 때 철컥 풍경도 잘려나간다
용산역과 이촌동 사이를 휘돌아나가는 중앙선 이곳에서 전동차는 곡선으로 휘어진 제 꼬리를 볼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호흡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백빈건널목 1톤 트럭의 확성기 소리도 번번이 허리가 두 동강나고 담장 아래 할머니들의 웃음소리도 허물어지는 동네 사람들은 소란한 종소리를 귀에 걸고 산다
철길 옆 옛날떡집 뿌연 백열등 아래 마주앉은 노부부 땡땡 소리 오고 갈 때도 바람떡 입에 물고 바람이 된 막내아들 소식만은 건너 오라고 철길 같은 두 줄 가래떡을 길게 뽑아낸다
철길 허리가 잠시 이어진다 팔당에서 바람을 쐬고 자정에 돌아오는 지하철 땡땡땡땡 붉은 종소리 피곤한 동네가 귀를 막고 꿈 쪽으로 돌아눕는다
날 선 칼날은 거뜬히 받아내면서 날쌘 한 방은 피하지 못했다
한 번도 불을 이긴 적 없는 나무 이제 이해하게 되었다 스스로 화기를 피해 바닥으로 내려온 나무도마를
이해원 시인 / 그때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다리 아래 폭력적인 어미가 있다
바다의 뚜껑이 열렸다 교각을 타고 오른 무수한 물의 알갱이 그들의 결속엔 쇠비린내가 난다 곁길이 없는 곳 가시거리를 좁히고 다가오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캄캄한 구름 위로 달린다 눈을 가린 닭처럼 둔해지는 바퀴를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구겨버리는 부드럽고 완강한 힘 모든 것은 안개가 사라진 뒤에 드러난다
부드러운 안개에 물린 쇳덩이는 숨을 놓는다 흥청망청 쓰던 속도는 증상, 안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길은 사라지고 구겨진 아침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햇살에 쫓긴 주범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비명과 뒤엉킨 잔해들 증거는 명백한데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매번 안개는 무죄, 견인차도 끌고 갈 수 없다
이해원 시인 / 역을 놓치다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이해원 시인 / 일곱 명의 엄마 아빠가 엄마 손을 잘랐다 흙에 묻어 놓고 맨날맨날 들여다봤다 엄마는 한 손으로 빨래하고 밥도 했다 엄마의 남은 손 하나를 또 잘라서 흙에 묻었다 손이 없는 엄마는 다른 데서 손이 나왔다 흙에 묻어 놓은 엄마의 손은 점점 자라서 몸통이 되고 거기서 손이 나와 엄마가 되었다 또 손을 잘라서 묻으면 엄마가 되고 되고 되고 그래서 엄마는 수없이 많아지고 아빠는 선인장 화분을 아주 많이 갖게 되고 엄마가 병원 가고 없으면 나는 집이 무서웠다 동생한테 엄마가 네 명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집에 유치원에 이마트에 그리고 피자집에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생은 엄마가 세 명 있으면 좋다고 했다 우리 집에 어린이집에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엄마가 있으면 좋다고 했다 동생과 나는 내 엄마 동생 엄마가 따로따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는 잠만 자는 엄마를 산에 묻었다 산은 아주아주 큰 화분이라고 아빠가 그랬다 아저씨들이 엄마를 흙으로 덮으면서 마구 떠들었다 저러다가 엄마가 깨면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엄마를 꺼내가지 못하게 아저씨들이 흙을 꼭꼭 밟을 때 나는 기도했다 엄마 싹이 일곱 개 나오게 해 달라고, 아주 큰 엄마 화분을 다 만들고 아빠가 물을 뿌릴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해원 시인 / 한강보수
용산역을 지나면 땡땡거리에 늘어선 한강보수 한강부동산 한강냉면… 파란 간판에서 물 냄새가 난다
한강이 먹여 살리는 거리 한강의 전망권에 프리미엄을 붙여 파는 한강부동산 한강의 이름으로 면을 뽑아내는 한강냉면 제철 만나 일찌감치 한강으로 나간 한강보수는 문이 잠겼다
이슬비에 흠집이 생기고 낚싯줄에 구멍이 나고 새들의 물갈퀴에 찢어지는 강 물도 제 깊이만큼 상처를 안고 있다 물을 보수하는 그의 손은 퉁퉁 불었다
유람선이 지나간 자리는 물의 조각을 덧대고 소나기에 뚫린 곳은 물결뜨기로 감추는 물의 손 겨울엔 바람의 장난을 피해 강에 얼음자물통을 채운다
강이 수위를 높일 땐 너덜너덜한 강을 둔치에 널어놓고 반듯하게 잘라 강둑에 못질하는 사내 바람도 산책로에 널린 가윗밥을 쓸며 바쁜 일손을 돕고 있다 다리에 가로등을 걸어놓고 철야를 하는 그들이 있어 한강은 언제나 새것처럼 흐른다
이해원 시인 / 몸을 장전하다
오후가 깨지고 다급한 숲이 날아올라요
출격, 외마디 비명이 내달리고 찰나의 비행이 뒤를 쫓아요 누가 저 숲을 말릴 수 있을까요
일사불란한 저 비행을 나는 훈련이라 합니다
필사적인 그들의 뒤편 시퍼런 강은 배후예요 배수진을 치고 달려드는 벌 떼 무차별 공격은 단 한 번의 선택이죠
천적도 두렵지 않은 일격 꿀벌의 몸속에는 한 방의 죽음이 장전 되어 있어요
목표물을 향해 힘껏 몸을 당겨 쏘는 벌들의 가미카제 유언이 살 속에 꽂혀요
목숨과 바꿀 만한 것은 꿀일까요 여왕일까요
몸의 뚜껑을 따는 순간, 자해한 죽음이 꽁무니에서 빠져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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