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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국 시인 / 어떤 개인 날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이제 나는 캄캄하게 죽었다
한갓 남루는 行廊 끝 돌아서는 바람의 것이고
젖은 구두는 칭얼대는 구름에게 던져주었다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이승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눈부신 푸른 푸른 날들의 사타구니를
연어 떼 탕, 탕, 들이받다 가겠지
주머니가 텅, 비어버린 어떤 개인 날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강현국 시인 / Blue
그 아이 아직도 철봉대에 매달려 있네 신발 한 짝 잃어버린 그 아이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하늘수박은 올리브 빛이다 바보야*
찬바람 불때마다 찾아오는 저 아이 철봉대 아직도 저 아이 매달고 있네
강현국 시인 / 그림자와 놀다
구석진 내 몸엔 잔소리처럼 비가 새고
그때 거기는 뜯기는 벌레와 뜯어먹는 벌레와 덤벼드는 벌레와 도망치는 벌 레와 벌레들의 잠꼬대와 잠꼬대의 새끼들로 우글거렸지 그때 거기는 툭하면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마른번개가 이무기를 데리고 퍼덕 퍼드덕 하늘로 솟구쳤 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만삭의 아낙들이 물동이를 깨뜨리던 그때 거 기는
비가 새고 흐린 등불은 자주 꺼졌지.
강현국 시인 / 숙제하러 온 아이 같이
괜히 왔다 간다는 거시기 끝으로 한 많은 이 세상 떼끼! 하고 떠난 어느 스님 같이
대중도 독자의 환호도 없는 글 쓰기를 하다가 나무 속에 자 보러 간 오규원 같이
내 잔이 이토록 넘치는 쓸쓸함 같이
자크 데리다가 한 평생 애도한 그 사람 같이 시냇물 다치지 않도록 유리 조각 줍는 당신 같이
숙제하러 온 아이 같이 숙제 다 못하고 떠나는 아이의 뒷모습 같이
-동행 2023년 가을호 발표
강현국 시인 / 하얀 통곡
혼자 가는 먼 길이 혼자 가는 먼 길을 데리고 먼 길을 가는 동안, 가득한 빈 곳이 가득한 빈 곳을 데리고 가득해 하는 동안, 남루한 세월로 가득한 아버지!
자책의 창끝이 옆구리를 찔렀다. 하얀 통곡이 쇳물처럼 쏟아졌다.
강현국 시인 / 아들을 위한 각서 - 세한도 44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이따금 우르르거리는 쥐떼들과 함께 2008년 3월 7일 모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허공과 공허는 다 같이 이름씨이다. 뼈다귀감자탕과 보쌈을 안주로 소주와 맥주를 밤늦도록 마셨다. 허공은 자연이고 공허는 인위이다. 소주와 맥주를 따로따로 마시다가 우리는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마셨다. 그대는 착해서 마시기 싫은 술을 내 식으로 벌컥벌컥 목마른 듯 마셔주었다. 잘 취해서 허공은 허공으로 발효하고 공허는 공허로 미끄러졌다. 허공과 공허는 비슷한 말이지만 섞이지 않는다. 허공하다는 말이 안 되고 공허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천정에서는 보이지 않는 쥐들이 우르르 우르르 소나기를 신고 뛰어다녔다. 공허가 한 짓이다. 허공을 떠다니는 남도의 꽃소식이 내 두개골을 열었나 보다. 새벽녘엔 쥐떼들이 아이젠을 신고 우르르 우르르륵 내 머리 속을 뛰어다녔다.
공허, 그것은 더렵혀진 허공이리라
강현국 시인 / 恍惚(황홀) 한시절 치욕은 한시절 치욕으로 발끝까지 뜨겁네
반야바라밀다심, 누가 활시위를 당기는지
가이없으라! 강 건너 내 그림자 캄캄하게 저무네
강현국 시인 / 너에게로 가는 길
너에게로 가는 길엔 자작나무 숲이 있고 그해 여름 숨겨 둔 은방울새 꿈이 있고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낮은 침묵의 草家가 있고 호롱불빛 애절한 추억이 있고 저문날 외로움의 끝까지 가서 한 사흘 묵고 싶은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미열로 번지는 눈물이 있고 왈칵 목 메이는 가랑잎 하나 맨발엔 못 박힌 불면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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