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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승철 시인 / 너무 조용하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6.
신승철 시인 / 너무 조용하다

신승철 시인 / 너무 조용하다

 

 

오늘 하루는

너무도 조용하다.

 

몽롱한 슬픔에

잠겨 있는

저 하늘 푸름

 

이상하다. 오늘은

나무들의 노래까지 비밀스럽다.

바닷가를 따라 길게

외길은 달려가고

사람의 그림자는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너무 조용해

아마 나는 지쳐있었나 보다.

 

도대체 이 육신 속엔

어떤 잠이 살아있길래

백치(白痴)같은 풍경들만이 펼쳐오는지

아무래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가만히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이

어떻게 속으로 살찌는 것인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아 나는 그냥

흙과 햇빛의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 땅의 맨끝에

맨발로 서서

무지하게 울고만 싶었던

단순한 사람이었다.

 

 


 

 

신승철 시인 / 기적수업

 

 

못 배운 사람

혹은 잘난 사람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

분별을 잃고 헤매는 사람

돈 많다고, 힘 있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

평평해질 때까지

그대들이

내 마음속에서

나무처럼, 풀처럼

의자처럼

편안해질 때까지

이윽고 그대들이

이 의식 속에 모두 들어와

함께 하나의 삶이 되고

산과 들, 강물과 더불어

하늘 아래

그대들이 나와 함께

하나의 대지가 될 때까지

하나의 꿈으로 완성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함께 기다려야 한다네

왜냐하면 그대들이 바로 나인 까닭에

내가 바로 그대들인 까닭에

​-시집 『기적수업』, 황금알, 2016

 

 


 

 

신승철 시인 / 토란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오랜만에

토란잎에 떨어져 구르는 빗방울

 

반가움에

하나인가, 둘인가, 셋인가

흥얼대듯 셈을 하나

 

점점

셀 수가 없네.

 

방향도, 처소도 없는 빗방울

수정 빛 똑같은 모양의 빗방울

 

신기루 같은 이 기억에서

자꾸 미끄러져 나가

 

가만히 이대로는

무엇도 셀 수가 없네.

 

이 몸이 품고 있던

혓바닥도, 언어도

어이없이 실종이 되어

 

지금은 너에게

어떤 말도 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네.

 

한도 없이

토란잎에 떨어져 구르는 빗방울

 

토란잎 좁고 여린 목덜미 쪽으로

모다 스미듯 내려가고 있네.

 

빗방울에 젖어도, 젖어도

결코 젖는 일이 없는

청정(淸淨) 토란잎

 

숨을 곳도 없어

벌거벗은 그 몸으로

 

위아래도 없이

위아래로 온종일 바람에 너울대며

 

시나브로

울려오는 야릇한 기쁨에 취해

 

 


 

 

신승철 시인 / 말의 꿈

–김영찬 시인에게​

찢어진 북 마구 두드렸다. 북소리에

회오回互하듯 먼 하늘에 흰 구름들

뭉실뭉실 부풀어 올랐다.

힘들이지 않고 (무의식에서) 상상하는 대로

창조되었다.

     산이나 용, 범이나 개구리, 혹은 선인仙人인가

     꼬물꼬물 신령스럽게 허공을 들락거리는

     무수한 정령들

무無에 뿌리 내리고 날아오른

무한 사랑의 저 고독한 춤사위들이

     딴은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다.

     어정쩡하고 매우 어설퍼 보일 수도 있겠다.

허나 환상 속에 진실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게 하나는 있지,

너의 <생각들> 삽시간에

너무도 홀가분하게 상승해버려

     괴로움이나 슬픔 따위 방금 전 구미 돋게 하던

     이야기까지 밍숭맹숭해지고, 지루해지고

     어느덧 까마득히 멀어져-

지금은 이 마음에서 비롯된 지난 그것들

아무튼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됐으니

*

찢어진 북 두드리다, 두드리다

사뭇 알아차리게 되었다. (항상 과거가 말썽부리지)

     언제부터인가. 확실치 않은 사랑 붙들고 색다른

     맛이나 찾는다며 구석구석 돌아다녔지- 나 혼자만

     미쳐가고 있었다는 것, 알지 못한 채 말이지.

     허나 이미 그 마음 세상에 다 들켜버려... 이후

     (어떤 잘못도 없었지만) 후회막급: 물론 다들

     알고 있었지. 창자가 꼬이도록 허기가 져도

     삼 팔은 이십 사이고 구구는 팔십일이라는 것.

세상 모습 바뀌어도, 나 자신은 변할 게 없다는 것.

또 이 바탕에선 어떤 선행善行도 소용없다는 것.

누가 그 몸, 몽둥이로 실컷 때려봐야 의미도 없다는 것.

다른 사랑 찾아 숨어버리려는 시도도 헛된 것이라는 것.

이 바닥에선 닥치는대로 수용해야 만사가 편해진다는 것.

그렇게 우물쭈물하다 문득 하늘 쳐다보다가-

모기 다리로 천국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용기 생겼지.

*

꿈꾸면서도 껍데기 이 몸, 거울 속에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네. 모든 것 내게서 다 떠나고, 그나마

여기 약간 남은 것마저 다 내준 그런 모양...

아이야, 아이야, 그런데 이 아이는

흰 구름, 푸른 산 계곡 입구에 걸어놓고

남의 꿈이나 대신 꾸며 지내온 것만 같도다.

*

흰 구름이여,

말의 꿈이여,

술맛 잊지 못하는

이 몸이 저지른

한바탕의 꿈이여,


신승철 시인 / 말​

 

​밖에선 헌 옷 입고 다니고

집에 와선 새 옷 입는다.

잔칫날엔 오히려 입 다물고

여기저기 다니며

낯설어하는 표정 드러낸다.

(촌놈은 어딜 가나 속일 수 없다)

날씨 화창한 그 날은

주워온 옷 뒤집어 입은 채

김가, 이가, 박가 만나느라

몹시 바빴다.

얼굴에 나타난 7천 가지의

불가사의한 표정들은

대충 읽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자세히 읽어봐야 머리만 아프다)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밖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왜 그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현대시 2023년 03월호 신작특집 중에서

 

 


 

 

신승철 시인 / 적멸보궁(寂滅寶)

 

 

옛사람이 이르길

 

혀는 그대로

아무 맛이 없으나

 

온갖 맛을

다 느낄 수 있다고 했네.

 

 


 

 

신승철 시인 / 낮잠에서 문득 깨어나 보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흙모래가 귀 기울여 듣고

 

번쩍거리는 냇물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놓인 크고 작은 돌

신나게 떠들고들 있네.

 

쉬지 않고 재잘대는 그 소리

투명한 햇살 덕에 거침도 없어

 

그러나 그 소리, 너무 명명백백하여

오히려 나는 알아듣기 힘들었네.

 

먼 곳 향해 온몸 일으켜 세우려는

맹렬한 그 의지, 어지러운 그 열정,

 

하지만 집히는 게 있지. 그 속사정,

이 바닥에선, 사람처럼 울음 우는 시능으로

자신을 드러내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지

 

어느새 세상이 남긴 이야기는 다 떠나

이 주변 고요해지고, 아늑해졌다.

 

지금 여기엔 그런 마음, 저런 마음

내가 아는 마음이란 것들은 도시 하나도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조용히, 실감났다.

얼음이 햇볕에 자취도 없이, 진지하게

녹아나는 그 심정...

 

하나 냇가에 하얀 꽃, 붉은 꽃들이 피어나

네 대신 이렇게들 활짝 피어나

누구의 입 하나 열지 못하게 하고 있었네.

 

그래, 온 곳을 알지 못하는 이 몸,

일도 없어, 옛 난간에 기대고 앉아

 

저쪽의 어린 나뭇잎들이나

하릴없이 살피고 있는 중이었지.

 

차가운 바람에 조용히 쏠리며 떨고 있는

어린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은연중에

 

아무래도 조금은 더 지켜봐야겠다는

생각 들었다. 햇빛 반, 어둠 반인

저 숲가의 어린 나뭇잎들을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쉬이 떠나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있는 건 아니었지만

막연히 그렇게 떠오른 한 생각이

무연히 독촉이라도 하는 듯하여...

 

오, 이 애매함, 아마 낮잠에서 덜 깨여

어떤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서인지 몰라

 


 

신승철 시인

1953년 경기도 강화 출생. 연세대 의대 졸업. 197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너무 조용하다』 『개미들을 위하여』 『그대 아직 창가에 서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있네』 『더없이 평화로운 한때』 등. 에세이집 『한 정신과 의사의 노트』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남편인가 타인인가』. 논문집 『연변 조선족 사회정신의학연구』 등. 연세대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역임. 현재 큰사랑노인병원장. 〈성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