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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장호 시인(서울) / 천막이 있는 벽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6.
박장호 시인(서울) / 천막이 있는 벽화

박장호 시인(서울) / 천막이 있는 벽화

 

 

시야는 움직이는 벽이다.

관찰자를 외면한 벽화 속의 두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침묵하고 있다.

나는 야유의 종이새를 접어

그림 속으로 날렸다.

 

남자의 오른쪽 귓속으로 새가 비행했다.

남자는 파란 하늘이 되었다.

새는 하늘의 왼쪽 귀를 물고

여자의 어깨 위에 앉았다.

여자는 파란 바다가 되었다.

새가 수평선을 물고 날아갔다.

 

파도가 잔잔한 해변에

몽골리언 악사가 천막을 쳤다.

평화로운 해변에 밤이 왔다.

 

별들이 입수하는 소리에 맞춰

천막 안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악사는 가사를 적어 내게 주었다.

 

나는 노랫말이 없는 가사를

새가 물고 온 수평선에 걸고

천막 속으로 들어가

잠자는 꿈을 꾸었다.

 

 


 

 

박장호 시인(서울) / 개업

 

늦은 밤 미용실에서 만나요.

영업은 끝나는 시간이 없고요.

우린 서로의 눈에 감춰놓은 자신을 보죠.

가발 벗은 그의 스타일은

빗이 들지 않는 대머리

아름답던 그의 실체

듣지 않아도 알아요.

입속엔 사탕 같은 절망이 가득

그가 자르고 싶어하는 건 머리죠.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아요.

여기는 무허가 미용실

나는 무면허 미용사

가위질을 시작해요.

그가 원하는 대로

머리를 자르려면 목을 오려야 해요.

질긴 동맥이 자꾸 가위에 씹히지만

그는 다그치지 않아요.

시간은 이주 많아요.

무딘 가윗날과 서툰 솜씨가

그에겐 오히려 좋은 일이죠.

미용의 즐거움을 더 오래 누릴 수 있으니까요.

미용은 혈관 밖을 흐르는 희망이니까요.

덜렁거리는 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요.

그의 머리는 사탕처럼 웃으며

바닥을 굴러요.

그는 내가 가꾸는 단 하나의 손님

출입문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죠.

누구도 오고 가지 못해요.

영업은 끝나는 시간이 없고

미용실은 문을 닫지 않지만

그의 머리 같은 사탕이 눈 속에 가득

좀처럼 녹지 않네요.

면허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박장호 시인(서울) / 외로운 사람은 사물이 된다

 

 

너는 불면에 시달린다.

너의 꿈은 잠드는 것이다.

너는 생리 현상을 꿈꾼다.

그것은 네가 사물이기 때문이다.

너는 낱말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 낱말은 이름이 없다.

너는 눈을 감는다.

그것은 네가 사람으로 된 사물이기 때문이다.

질끈 감은 너의 눈이 낱말을 흘린다.

나는 낱말에 내 이름을 붙인다.

이름 붙은 낱말이 사물이 된다.

너의 눈에서 사물이 흐른다.

나는 너의 눈물이다.

너의 눈물이 베개를 적신다.

젖은 베개에서 새싹이 돋는다.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뻗는다.

관다발 속으로 눈물이 솟는다.

하얀 꽃이 핀다, 가시가 돋는다.

내가 장미를 좋아해서

하얀 꽃은 하얀 장미가 된다.

사람은 사물을 배신해서

가시 하나가 장미를 찌른다.

장미가 피를 흘려서

하얀 장미는 붉은 장미가 된다.

출혈하는 장미의 입술이 말한다.

사물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너는 사람으로 된 사물이다.

너는 불면에 시달린다.

 

—《현대시》2016년 4월호

 

 


 

 

박장호 시인(서울) / 스테디 라이터

 

 

불 꺼진 집필실로 여자가 들어온다.

책상 위에는 낡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다.

여자는 서표로 끼워둔 사내를 일으켜 세우며 노트를 펼친다.

여자는 만년필을 꺼내 들고 사내의 얼굴을 찍어 혈서를 쓴다.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 라고 여자가 쓴 첫 번째 문장 뒤에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 라고 여자가 쓴 두 번째 문장 뒤에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 라고 여자가 쓴 세 번째 문장 뒤에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 라고 여자는 네 번째 문장을 쓴다.

 

피범벅이 된 노트 위에서

사내는 혈서의 행간을 읽는다.

 

여자는 사내를 안고 첫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

여자는 사내를 안고 두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

여자는 사내를 안고 세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

여자는 사내를 안고 네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

 

흐르는 행간 위로

마침표가 떠간다.

 

마침표도 행간도 없는 창문 밖에 해가 뜬다.

침대 위에는 새빨간 사내 한 명이 누워 있다.

여자는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몸을 침대 시트로 덮은 뒤

옷을 입고 여관을 나간다.

 

 


 

 

박장호 시인(서울) / 양과 쥐가 만나는 시간

 

 

밤의 손톱 위에 누워 눈을 감는다.

내가 가진 단 하나의 침대

썩은 지폐라도 얻으려면 자야 한다.

나는 권좌에서 물러난 어둠의 군주

왕에게 배신당한 아침의 쥐들이

밤의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시간의 배후를 파고드는 저 쥐들보다 느리면

오늘밤도 영락없는 미라다.

머리맡을 성급하게 찾아온 수면 여왕이

이마 위에 한 올 머리카락을 흘린다.

가늘고 섬세한 감촉이

한 무리의 양 떼를 깨운다.

백일몽을 꾸던 푸른 초원은 어디로 갔나.

나는 양들을 위로할 노래를 부른다.

하나에서 시작하는 끝을 모를 노래.

양 하나에 신화와

양 하나에 왕국과

양 하나에 몰락

나의 눈을 들여다본 슬픈 양들이

어둔 시간의 모래 언덕을 넘는다.

양과 숫자 들이 멀어지는 모습,

밤의 손톱이 깎여 오는 모습이

빼앗긴 나라의 슬픈 전설 같다.

양과 쥐가 만나는 시간,

망국의 하늘에 하얀 달이 야윈다.

 

 


 

 

박장호 시인(서울) / 허무를 향한 도약

 

 

오늘밤의 목적지는 당신의 얼굴입니다.

수풀처럼 우거진 머리카락 속에서 짐을 꾸립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나의 짐이자

내가 보내지 못한 당신의 짐.

편지는 더 이상 쓰지 않겠습니다.

새벽이 오는 길목이면 편지에서 걸어 나와

머리카락을 헤치고 떠나야만 하는 당신.

알아볼 수 없는 길을 향한 필기를 바라보며

멀어지는 발을 동동 구르던 당신 눈 속의 여백.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스쳐 갈 뿐입니다.

밤은 내 얼굴처럼 길기만 합니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하늘이 눈물을 흘립니다.

자음과 모음과 수음 속에서 청춘이 닳아 버린 것입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거행된 격리.

너무 잔인한 학문을 우린 배웠습니다.

스무 살의 별들이 반짝이는 개론서에 정의된

당신과 나의 거리는 가까워서 멀기만 합니다.

기호조차 될 수 없는 우리

내가 '나'만의 모음이었다면

당신만을 바라보는 좌익이 되었을 텐데.

당신이 '너'만의 모음이었다면

나만을 지지하는 우익이 되었을 텐데.

상상으로 끝난 사상 속에서

나는 시들고 당신은 희미합니다.

하나뿐인 이마를 맞대고 논의해도

입 맞출 남자, 여자 하나 없습니다.

염색한 눈썹을 하늘의 이마에 붙여 주는 밤입니다.

건빵 속의 별사탕은 참으로 아늑한 수면을 주었죠.

피부의 참호 속에서 걸어 나와

지뢰가 되어 버린 별들을 밟아 가는

오늘밤의 목적지는 당신의 얼굴입니다

 

 


 

 

박장호 시인(서울) / 전망 좋은 창가의 식사

 

 

 적막한 원시를 해체하고, 당신과 나는 창가에 앉아 아침을 먹습니다. 까만 겨울밤을 보낸 우리의 창밖엔 당신의 나도, 나의 당신도 없습니다. 공존하는 우리의 부재가 당신과 나의 창을 반투명으로 만듭니다. 창밖의 사람들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햇볕 좋은 곳으로 봄 소풍을 갑니다. 우리가 피웠던 침대 위의 흰 꽃이 떠오릅니다. 송곳니와 부리를 발라 낸 한 송이 눈꽃, 꽃의 향기는 나침반의 붉은 바늘처럼 나를 따라옵니다. 눈에 띄면 녹아 버리는 침묵의 문명, 나는 식탁의 북쪽에서 당신은 식탁의 남쪽에서 질기고 오랜 식사를 합니다. 우리는 마치 낙오한 극지의 동물들 같습니다. 우리의 배경에 희끗희끗 눈발이 비치고 하얀 평원이 펼쳐집니다. 나는 얼음 수염을 달고 당신은 얼음 눈썹을 달고, 멸종 직전의 북극곰처럼 남극에서 길 잃은 북극제비갈매기처럼, 우리는 서로의 눈 속에 녹아 흐르는 만년설을 봅니다. 물속에서 연어들이 솟구칩니다. 붉은 연어 알이 말할 수 없는 사연으로 쏟아집니다. 날카로운 수저로 뜨는 결별 의식. 이 사연을 다 삼키면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밀봉된 편지가 되어 무리를 찾아 나서겠지요. 창밖의 사람들은 푸른 잔디 위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식사를 멈춘 우리의 식탁 위에 하얀 살갗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박장호 시인(서울)

1975년 서울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2003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대산창작기금과 2013년 제14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시집 『나는 맛있다』 『포유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