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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구 시인 / 산위에서
내 밟힌 그림자도 살이 찌는 이 가을에 기러기 눈물 같은 낮달 하나 떠오르면 골짜기 깊은 안개가 능선 위로 넘어가고
열매를 뜸 들이며 허물 깁는 하늘빛이 무지개 얹어두고 넘쳐오를 것이지만 메아리 경계로 두른 연봉들이 부침하다
마음만 헤아리면 궁색한 가난인데 바람이 먼저 물든 단풍으로 불을 댕겨 신혼의 아내는 지금 꽃씨 봉지 접는다
-시조집 『마량리 동백』 (고요아침) 중에서
이석구 시인 / 꽃을 먹으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내가 내 손 잡고 진달래꽃 한 점 두 점 화전花煎을 지지다가 술잔을 기울여 가며 돗자리에 앉았다
치마를 살짝 들어 햇살을 잡아당기자 뚜껑 열린 술 향기에 아내는 취해서 운다 꽃 진 뒤 기다려야 할 내년 봄이 멀었다고
이석구 시인 / 상감(象嵌)유리목걸이* 속의 여자
시간이 지날수록 기우는 달그림자 애타는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 건가 머나 먼 초원길 따라 신발 끈을 고쳐 매며 유리띠 곱게 둘러친 새파란 물병 쥔 채 모래와 바람 실은 단봉낙타 등을 타고 오래 전 돈황을 거쳐 서역에서 온 여자
늦은 밤 거울 속을 바라보며 미소 지은 건 분꽃 가루 걸러내 화장을 고치는 건 울타리 문 밖에 서서 처용을 기다리는 거
낭산을 지나가다 도리천에 혼자 올라 빨강 노랑 하얀 꽃이 가득 핀 숲에 들다 골짜기 물살에 밀려 행방불명이 된 건
지상에서 인연은 흐르는 꿈이었다며 훗날, 유리를 감싼 금박 씌운 구슬인양 대나무 피리 구멍 찍힌 입술연지만 붉고
코발트 유리컵을 남겨놓고 떠난 그녀 검고 긴 속눈썹에 은쟁반 비춘 달빛 한 가닥 비단 실 뽑아 나비되어 날았다
*경주시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목걸이
이석구 시인 / 납매蠟梅
발자국 꾹꾹 찍힌 얼음장 풀린 뒤
당신과 내 그림자는 물에 뜬 꽃잎 한 점
속눈썹 파르르 떨며 어디에서 꽃피우나
바람 구멍 숭숭 뚫린 끝물의 붉은 매화
큰 돌 작은 돌이 에워싼 강물 소리
꽃망울 가운데 놓고 누가 먼저 향을 받나
이석구 시인 / 그늘이 초록을 만졌다
소나기 한 줄기가 쏟아진 다음에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물 위에 입혀진 무늬 당신의 긴 그림자
바람이 분다 불어도 그 끝을 잡지 못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흐르는 뭉게구름 배추밭 고라니 발자국 왔다 갔다 서성이고
잘못 드는 길이면 그대로 주저앉을 팔월 여름의 반은 물결에 떠올라서 수북이 쌓인 풀잎이 꽃피는 줄 몰랐다
이석구 시인 / 베트남 신부(新婦)
누굴까 그대에게 나보다 먼저 가서 야자수 잎사귀 아래 신발 몰래 감춰두고 빈자리 하나 만들어 기다린 이 누굴까 벽속에 귀를 대고 문 밖을 단속하다 스프링이 풀리며 조금씩 흔들리는 몸 오늘 밤 긴 잠에 빠진 허황후가 되고 싶은 나 그대 마음같이 닮은꼴로 변하여 춤추지 않아도 참 푸른 하늘인데 말갛게 꽃대를 올린 호접란이 눈부시다
이석구 시인 / 제45번 푸조나무
담양천 한가운데 가장 빠른 물속으로 징검다리 물결 따라 돌아 나온 그림자 박씨네 태국 며느리가 딸애 손잡고 건넌다
메콩강 야자나무 잎사귀 무성한 길
우기雨期의 바람처럼 새떼들 날아올 무렵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구름이라 생각하다
관방제림에 뿌리를 둔 45번 푸조나무 주름 깊은 물살이 고였던 습지에서 엄마 손 놓친 딸 아이 울고 있다 엉엉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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