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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수정 시인 / 일그러진 하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7.
이수정 시인 / 일그러진 하루

이수정 시인 / 일그러진 하루

쭈욱 늘어난 침대

쪼그라든 책상

구겨진 시계가 찢어진다

원근법은 없다

비율이 왜곡된다

하루가 빛과 색으로 영롱했던 때도 있었다

빛이 휘발된다

색채들이 섞인다

다른 것들은 섞지 말라니까!

섞일수록 어두워지는 말들 위로

마블링 하는 혀가 움직인다

현기증 속에서

강아지가 맹수로 자란다

좁아지는 출구 쪽

한 사람이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게 보인다

 

-시집 <나는 네 번 태어난 기억이 있다>에서

 

 


 

 

이수정 시인 / 로드킬

많은 사람이 지나간 길을

나 또하 피할 수 없어

지나간다

심장이 철렁

눈을 감고 싶지만

애도의 순간도 없이

길은 계속된다

작은 몸에 깃들었을

따뜻함과 기쁨

목마름과 배고픔

두려움과 고통

길지 않았기를

태어나서 좋은 날도 있었기를

그러나 모든 것이 길지 않았기를

존재한다는 것은

폐를 끼치는 일

길은 계속되고

길에서 마음이 죽는다

 

 


 

 

이수정 시인 / 집이 나를 밀어낸다

집은 춥다

조금 열린 장롱이

나쁜 숨을 내쉰다

좁은 장롱에 걸린 날들은

다려도 다려도 구겨진다

생각은 자꾸 쌓인다

먼지처럼 굴러 다니고

한쪽에서 내가 잠을 잔다

덮을 꿈이 없다

젖은 피로를 끌어올려 덮고

잠이 든다 밤새 걷고

또 걷지만 제자리다

등이 춥다

알람이 운다

전화벨이 문틈으로 스며든다

속수무책이다

이명과 두통이 임계점에 닿고 있다

방안 가득 수화하는 손들이 떠 있다

집이 나를 밀어낸다

집은 춥다

 

 


 

 

이수정 시인 / 양파

양파는 냉장고 야채 칸에 있다.

그냥 얌전히,

둥근 구근인 채

매운 입자를 숨긴 채

맵고 독한 허무를 끌어안은 너를

꾹 눌러주고 싶다.

멍들게 하고 싶다.

매운 향은 숨긴 채,

파슬리와 홍당무 속에 놓인

그냥 야채인 것처럼 놓인

천연스러운 네 얼굴을 눌러주고 싶다.

웅덩이처럼 슬픈 눈을,

유리로 차단된 방안에

서성대는 너를 냉장고에서 꺼내고 싶다.

까도 까도 속을 보이지 않는 너를

이제 그만 야채 더미 속에서 꺼내고 싶다.

영상 4도의 야채 칸에서

냉장된 꿈을 꾸며

썩지 않는 숨만 쉬는 너.

맵고 독한 맛으로

남의 눈물만 질금거리게 하는 너

냉장고 속의 너를 꺼내고 싶다.

밖으로 속마음을 펼치며

검은 반점으로 서서히 썩어가는 너를

보고 싶다.

 

 


 

 

이수정 시인 / 희고 긴 이빨을 가진,

창가의 검은 항아리 셋,

어제. 오늘. 내일.

가운데 키 작은 항아리,

육중한 덩치의 어제와 내일을 비집고

항아리 같은 어둠이

바다코끼리처럼 미려와 쌓인다

두려움은 희고 긴 이빨,

거추장스러운 코를 가지고

밤새 점멸하는 신호등

정지와 통행은 무법하고

라이트를 켜도

코끼리만 부대끼며 울럭이는 밤

희고 긴 이빨만 번득이고

 

 


 

 

이수정 시인 / 음지식물

이 방의 세반고리관에 앉아

글을 쓴다

안쪽이다

어두운 그곳에서

조심스레 감광한다

역광인 그곳에 앉아

검은 그림자와 함께

나는 창백한 감광지가 된다

빛이 들어올 것인가

어둠 속에서 밝아진 눈은

빛에 눈멀어 더듬대다

세 번 반을 미끄러진다

어지러운 건 나뿐이다

 

 


 

 

이수정 시인 / 저물녘의 고유 진동수

건반 하나를

내려친다.

팽팽하게 떨리는 현,

'파' 음계를 뛰어 넘은

말들이,

고삐를 끊은 말들이

달린다.

들판이 가득 푸른 갈기에 덮이고

들판 끝까지 달려간 말들이

출렁이는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바다로 간 말들이

쌓이고 쌓여

검은 수심을 이룬 채

일렁이며 눕는다.

그대와 나 사이

붉은 건반을 펼쳐든

노을이 걸리고,

말 울음소리로 깊어진

어둠이 온다.

 

 


 

이수정 시인

1974년 서울에서 출생.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현대시를 전공하여 석사 및 박사학위. 현재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재직. 시집 『나는 네 번 태어난 기억이 있다』.